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쉬스창 (문단 편집) === 중화민국 2대 대총통 === 1918년, [[펑궈장]]의 임기가 만료되어 가면서 차기 대총통 자리를 놓고 직계와 환계의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돤치루이가 펑궈장에게 군사적 기반이 없는 쉬스창을 대총통 후보로 추천하면서 만약 쉬스창을 대총통으로 삼으면 펑궈장에게 부총통 자리를 양보할 것이고 만약 펑궈장이 부총통 자리까지 마다한다면 자신도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다. 6월 19일 톈진의 독군단 회의가 쉬스창을 지지하였고 9월 4일 쉬스창은 의회에서 436표 중 425표의 찬성표를 얻어 중화민국 2대 대총통[* [[리위안훙]]과 [[펑궈장]]은 계임되었기에 대수를 따지지 않는다]에 당선, 10월 10일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돤치루이가 약속대로 국무총리에서 물러나고 12월 20일 내무총장 [[첸넝쉰]]이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돤치루이는 여전히 참전독판으로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부총통은 쉬스창이 남방인사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휘군벌]]이 호법전쟁에서 공이 큰 인물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다투는 바람에 정족수 미달로 선출되지 못했다. 취임 직후, 쉬스창은 만청의 왕공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맡게 된 것은 어린 황제를 위하여 섭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취임에 맞추어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장건 등 명사들이 10월 23일 평화기성회를 조직, 내전의 중지를 호소하였으며 전 대총통 [[펑궈장]] 등 기존의 주화파는 물론 안휘독군 [[니쓰충]]을 비롯한 주전파들도 동의하였다. 남방에서는 쉬스창의 총통 취임에 반대하며 쉬스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쉬스창이 10월 24일 평화령을 선포하고 11월 16일 각 부대에 정전령을 내리자 이에 호응하여 11월 22일 정전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은 종결되었다. 1919년 2월 20일부터 상하이에서 남북화의가 열렸지만 의견대립으로 인해 결렬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히게 되자 분노한 학생들이 [[5.4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첸넝쉰]] 내각이 사퇴하고 [[궁신잔]] 내각이 들어섰지만 9월에 [[궁신잔]] 내각도 사퇴하면서 육군총장 [[진윈펑]]이 국무총리를 대행하였다. 쉬스창은 첸넝쉰의 사임 이후 형식적으로 의회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약법에 총통의 사직은 근거가 없다고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이후 쉬스창은 [[베르사유 조약]]을 추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1920년, 산동성 곡부에서 공자의 77세손인 [[쿵더청]]이 태어나자 이미 중국이 공화국이 된 상태였지만 쿵더청의 [[연성공]] 세습을 허용하고 쿵더청의 탄생에 군대를 보내 보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