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쉬스유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팔로군]]으로 편제되어 항일전쟁에 참가했다. 1938년 팔로군 129사단 386여단 부여단장에 임명되어 평원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1940년 팔로군 산동군단 3여단장과 군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교동 [[군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정풍운동]] 기간 중 장궈타오의 부하였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숙청]]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마오쩌둥]]이 쉬스유를 직접 불러 장궈타오를 따라가고 싶은지 아님 자신을 따르고 싶은지를 물었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마오쩌둥을 따르고 싶다고 말하여 이후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고 장궈타오를 기회주의자, 협잡꾼으로 맹비난하였다. || [[파일:중일전쟁허세우.jpg|width=100%]] || || 1939년의 쉬스유 || 종전 후 1947년, [[화동]] [[야전군]] 9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어 우라이 전투, 멍량구 전투 등에 참가했다. 이후 화동야전군 산동병단을 이끌고 [[탄전린]]과 함께 산동전선에서 국민정부군과 교전했다. [[교동]], [[연주(중국)|연주]] 등을 함락하였으며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고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공격하였다. 1948년 9월 16일부터 시작된 제남 전투에서 쉬스유는 국민정부군을 격파하고 8만 4천명을 섬멸, 9월 24일 제남성과 2수정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9월 28일 사령관 왕야오우를 체포하였다. 중공 건국 이후 요직을 거쳤으며 1950년 산동군구 사령원에 임명, 1953년 4월까지 재임하였으며 1953년 4월, [[중국 인민지원군]] 제3병단 사령원에 임명되어 [[6.25 전쟁]] 막판에 잠시 참전했다. 1954년 2월에 귀국, 화북군구 제2부사령원에 임명되었으며 1954년 10월, 인민해방군 [[부참모총장|부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59년 10월까지 재직했다. 1955년 3월, [[난징군구]] 사령원에 임명되어 20년 가까지 재직하였으며, 1959년 9월, 국방부 부부장에 임명, 1978년 3월까지 이 역시 20년 가까이 재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