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덕제 (문단 편집)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친명과 배금의 기조를 내세우며,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홍타이지가 한으로 등극할 무렵 아민은 >"그대는 즉위한 후 내가 외번으로 나가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는 조건을 제안한 바 있었고, 아민은 조선 침공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1627년 후금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아민을 조선 침공의 선봉으로 위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정묘호란]]''') 아민의 이탈 시도는 버이러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천연두 등으로 흐지부지되었고, '''정묘화약'''이 성사되면서 [[광해군]] 말기, 국서의 발송까지 진전된 양국 관계가 다시 복구되었다.[*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p. 167~172;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정묘화약으로 성사된 양국의 국교는, 상충되는 입장과, 관계 유지의 상이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지점을 통해 점차 안정화되었고 범월, 세폐, 개시, 동강진 등의 현안들은 교섭을 통해 합의점에 도달했다. 이 같은 추세에서 [[1633년]] 조선은 정벌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후금의 제장들은 조선이 스스로 귀부하거나 언제든지 쳐서 복속할 수 있다고 했으며, 설령 조선이 화약을 잘 지키지 않더라도 경제적 교역을 유지하는 등 화호를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57;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9~303.] 동몽골 차하르(찰합이)부의 잔류 세력을 흡수하고, 북방의 흑룡강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금에서는 홍타이지의 존호를 쟁점으로 체제 전환의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후금은 조선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흑룡강과 [[동해]] 연안에 대한 세력 확장과, 차하르 세력의 복속 그리고 명나라의 심(양)•요(양)와 송산 공략 사실을 자랑함으로써 조선에게 결단을 시사했다. [[1635년]] 10월에는 차하르부의 칸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과시했으며, 1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를 빌미로 인조에게 형인 한, 즉 홍타이지에 대한 공경을 요구했다.[*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듬해인 [[1636년]] 정월 홍타이지는 존호 문제에 대해 조선 국왕의 동참을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후금의 대신들과 몽골족 버이러들은 조선에 들어와 존호례에 인조가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그간 조선은 명나라 황제를 위로 두는 전제하의 '형제'라는 명분으로 화친을 정당화했었다.[* 홍타이지도 종종 명나라 황제보다 자신을 하위에 두는 등 대외적으로는 상위로서 명나라 황제를 인정하기도 했다.] 때문에 홍타이지의 '칭제'라는 쟁점으로 그 전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화호를 유지하는 명분을 확보하기는 어려웠고, 전쟁을 불사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사절단은 귀국길에 인조의 절화교서를 탈취했다. 칭제를 인정할 수 없는 조선의 태도를 홍타이지는 용인할 수 없었다.[*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홍타이지는 외교적인 시도를 통해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조선을 역이용하여, 1636년 12월 8일 조선을 기습적으로 침공했으며,('''[[병자호란]]''')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와 조선 조정은 농성 50여 일도 안된 1월 21일 대청의 연호와, 표문의 형식을 갖춘 봉표 칭신의 예를 이행했다. 이후 홍이포의 위협과 신하들의 압박, 그리고 군심의 이반이 심화되는 가운데 왕족들이 피난을 간 강화도가 단 하루만에 함락됐다는 최악의 소식이 전해지자, 1월 30일 인조는 쪽색 옷을 입고 서문으로 출성하여 홍타이지를 대면하고 [[삼전도의 굴욕|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 삼전도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으로 인해 인조의 권위가 근본부터 훼손되었다. 이에 척화파 배척과 친청 행보를 보였으며, [[소현세자]]를 비롯한 인질로 인해 지배층의 정치, 사회, 경제적 손상과 혼란이 초래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로 인해, 대일관계에서 임진왜란 이후 강력한 대일정책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경록(2008), <조선의 對淸關係 認識과 外交體系>, 《이화사학연구》 37, p.155.]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해 승리했으나, 당시 조선에서 유행한 [[천연두]]를 염려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는 대신 자국의 대외적인 권위만 확립했다. 만주족은 유전적인 특성상 조선인이나 중국의 한족보다 천연두에 훨씬 취약했는데, 숭덕제 홍타이지도 천연두를 앓지 않아서 면역이 없었다. 특히 최근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http://sillok.history.go.kr/mc/id/qsilok_003_0370_0010_0010_0050_0020|《청태종실록》숭덕 2년 7월 5일(1637년 8월 24일) 2번째 기사]]에서 홍타이지 자신이 직접 병자호란 때 피두선귀(避痘先歸)[*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했음을 언급했다면서 전쟁이 단기간만에 종전한 이유는 '''천연두'''였음을 고증했다.[[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책마을] 병자호란의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만약 천연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남한산성은 약 30,000명 중 20,000여 명이[* [[http://sillok.history.go.kr/mc/id/qsilok_003_0100_0010_0020_0020_0010|《청태종실록》 천총 5년 11월 2일 1번째기사]]] 전사나 아사 등으로 죽은 대릉하성 전투와 같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인조]]도 퇴위당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굴욕에서 삼궤구고두례가 끝난 후 숭덕제가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히도록 하라."''' 고 명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만주인 고관들'''만'''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던 일들이나 예친왕 [[도르곤]]과 인조가 서로 나눈 대화 등을 보면, 자국의 연호를 따르게 하고, 군신 관계의 예우를 명나라에게 하던 시절과 거의 똑같이 한 것은 단지 조선을 신하로 만든 것만이 아닌, 명나라 시절과 같은 청나라 중심의 군신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한편, 청군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최대 600,000명이라는 추정치가 있는데, 한국에서 그 숫자를 그대로 믿는 국내 학자는 요즘엔 거의 없다. 당연하지만, 저 숫자는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호왈]]일 뿐이다. 특히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기에 기록을 모두 믿을 수가 없다.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0,000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 당시 청나라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마저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저 600,000명이라는 숫자부터가 청나라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0,000~600,000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출처]] 당시 청나라 인구가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을 모두 포함해서 최대 130만~24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인 포로가 그렇게 잡혀갔다면 조선인들이 청나라 내에서 최대의 인구 집단이 됐을 거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군의 전략이 속전속결이어서 포로 사냥에 열중할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과 당시 조선 내에 천연두가 유행하는 상황속에서 조선인들 중 누가 천연두에 걸렸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인데 대규모로 포로들을 데려간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이 최대 50만~60만 명이라는 주장은 객관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있었고 그 수가 적지 않았으며, 조선 조정이 이들을 소환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미흡했다는 것, 그들 가운데 어찌어찌 자력으로 고향을 찾아 돌아온 사람들조차 이런저런 멸시와 차별에 시달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환향녀]] 문제가 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는 조선의 큰 사회문제가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는 의례상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대부들은 들을 생각이 없었고 그녀들을 내쳤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기생도 아닌 창부를 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