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자 (문단 편집) ==== [[성악설|성악론]] ==== >무릇 사람이 선善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박하면 중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협소하면 광대하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미천하면 고귀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그 안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들기 마련이다. > ''순자'', <성악편> 순자는 맹자의 성선론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고, 본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동아시아에는 서양처럼 실체로서 악(Evil)이나 [[악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惡)의 반대는 [[노자]]와 [[대학(경전)|대학]]에 나오듯 미(美). 사실 善도 惡의 반대로 쓰이긴 했는데, 善은 착하다는 의미보다 좋다는 의미가 훨씬 강했다. [[다다익선]]이란 말의 뉘앙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자 [[마]](魔)라는 글자도 [[불교]]의 [[마라]](mara, 악마)를 음역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낸 글자다.][* 사실 '조악(粗惡)하다'의 뜻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므로, 성악설이라는 명칭이 자체부터 틀린 말은 아니다. 괜히 잘난 척 한다고 주변에 "이봐, 순자는 '성악'을 말하지 않았어. 그의 주장은 정확히는 '성오설'이다!" 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학계에서 [[김용옥|도올]] 외에는 그냥 다 성악이라 지칭하는 편이다. 그리고 도올도 선진(先秦) 문헌에 있는 '(惡)'자를 죄다 '오'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든, ''악'이든 선진 문헌의 '(惡)'자에 '(善)'과 이원적으로 대립하는 구도의 강력한 윤리형이상학성이 없는 건 맞다.] 반면, 맹자는 성(性)을 선(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학문이나 교육을 성(性)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순자》를 보면 "맹자는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다' 했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하겠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본성은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힘들면 쉬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려고 하는 것이므로 배고파도 가족과 나누어 먹고, 힘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등의 행위는 인위적인 결과이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상관없지만, 문명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낙후된 환경 속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인위적 윤리를 얻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본성에 따라 사는 바람에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난세가 왔다는 것이다. 순자는 성(性)을 악/오(惡)로 규정했기 때문에 선(善)을 만드는 인위(僞)[* 인위(人爲). '거짓'의 의미가 아니다.]의 기능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위(僞)' 는 성(性)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지며, 성(性)보다 그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자는 위(僞)의 대표적 작용인 '학문', '교육'[* 옛날에는 사실상 가정교육이며 독학이며 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을 찾아 그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결국 '교육 받음'이며 '학문함'이었다. 여기서 이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키운다!" 순자의 눈에는 이만큼 휘황찬란한 위(僞)의 작용은 없었을 것이다. 무려 제곱의 위(僞)!] 등을 자기 학설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이것의 실용성, 필요성을 치밀하게 논증하였던 것이다.[* 순자가 보는 성(性)의 범주는 맹자와 달랐다. 맹자는 오늘날 관점으로 본다면 '습성', '품성'으로 분류될 만한 몇몇 특질 또한 '하늘의 의지로 그렇게 설계된 것'으로 간주하여 뭉뚱그려 성(性)으로 명명하였는데,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엄격한 구분을 요청하였다. 본연적인 성(性)은 본연적인 성이고, 인위(人爲)는 인위(人爲)인 것이다.] 맹자는 '인의(仁義)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良能)'이라 보았지만, 순자는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은 타고난 능력(良能)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타고난 지능(良知)이다. 두세 살 난 어린 아이는 누구나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커서는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안다. 어버이를 친애하는 것은 인이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의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과 의를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진심상15)] 맹자는 선한 행위란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의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 사단을 말한다. 감정에는 사단과 칠정이 있어서 이성과 대비된다. 이 분류에는 논란이 있었는데 사단을 이로 볼것인가 기로 볼 것인가에 따른 논쟁으로 조선시대 때 사단칠정론이 생겼으며, 사단은 감정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순자가 볼 때에는 '젖먹이 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다만 동물적 가족애일 뿐 인(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장성하여 형을 존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순종성의 발로가 아니라, 장성하는 과정 중에 이미 가정교육을 거쳤으므로 도출된 인위의 결과이다.[* 인의왕도론(仁義王道論)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맹자는 의(義)를 인(仁)과 짝지어 그에 준하는 주덕(主德)으로 격상하고 줄기차게 인의(仁義)라 병칭하였는데, 사실 맹자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고 순자 또한 《순자》에서 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순자의 인의(仁義)는 일체의 선험성이 없는,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되는 위(僞)의 덕(德)이다.] 즉, 순자가 주장하는 것은 선(善)이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배워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의 성선설은 배울 수 없는 환경에 처한 무지랭이 백성이라도 자신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갈고 닦으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데서 희망을 주며, 순자의 성악설은 그 본성이 나쁜 군주나 정치인이라도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배운다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데서 그 의의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