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자 (문단 편집) == 개요 ==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의 [[철학자]]. 이름은 황(況). 경칭으로는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 현대 중국어로는 쉰쯔(荀子, Xún zǐ).] 15세부터 직하학궁(稷下學宮)[* 전국시대(戰國時代)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의 수도 [[임치]]에 있던 학술원(學術院)으로, 직하(稷下)는 임치의 서문 앞에 있던 직산 밑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우곤]](淳于髠), [[맹자]](孟子), [[추연]](鄒衍), 전병(田騈), 신도(愼到) 등 굴지(屈指)의 학자들이 모두 이곳에 머무른 예가 있다.]에서 공부하였고 훗날 그 좨주(祭酒)[* 직하학궁의 총대표를 말함.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급. 한자 사전을 보면, "祭酒(좨주): 벼슬 이름. 祭酒는 좨주로 읽는다."로 되어 있다.]를 세 차례 역임하였다.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당하면서 파직된 이후로는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복상|자하]]와 [[맹자]]를 비판하고 [[공자]]의 본래 뜻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였으나, 사실 순자의 예(禮)는 공자보다 법적인 부분이 강하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를 받아서 선진(先秦)사상의 집대성자라 칭하기도 한다. 이후 한-당나라 시대 때 정통 유학자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나, 당나라 말 대유학자 [[한유]]가 순자의 학설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후로 성리학에서까지 부정되어 왔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뼈대로 하였기에 인(仁)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면서도, '예(禮)'에 따라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여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 예(禮)의(義)를 둘 다 강조하였지만, 여기서 순자의 '의(義)'는 '예(禮)를 지키는 의로움(義)'인 것이므로, 사실상 예(禮)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예치(禮治)에 따르면, 왕(군자)은 어진 마음(仁)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예(禮)라는 사회질서' 를 통해 귀천을 나누어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순자의 왕도정치)[* 맹자의 왕도정치는 군주가 어질게 하면 저절로 백성이 감화되어 다스려지는데 비해, 순자의 왕도정치는 군주가 어질게 행동해야할 뿐만아니라, 예절을 통해 사람들의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고 '신상필벌'을 바르게하게 하여 도덕적 질서를 엄격하게 세워야 다스려 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한비자]]와 이사 등은 왕이 굳이 어진(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능력있는 신하를 등용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와 부국강병해진다는 패도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왕도정치는 가식적이며 여유있는 시대에서나 사용가능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게 되므로, 따로 법가를 만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