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삼황오제) (문단 편집) == 이상적인 인격자로서의 모습 == 유가의 기록에서 순은 성천자 [[요(삼황오제)|요]]에게서 왕위를 '''[[선양]]'''받은 이상적인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이 순을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도를 다하고 우애를 잃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는 그 뛰어난 인격으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했기 때문에 명망을 얻어 요에게서 선양을 받았다는 것이다. 《[[십팔사략]]》에 따르면 가정에서 순을 죽이려는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계모]]였다. 아버지 고수는 기록에 따라서는 어머니와 한통속이었다고도 하고, 우매해서, 혹은 시각에 장애가 있어서 그런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순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계모가 순을 죽이려고 우물을 파라고 한 뒤 순이 땅을 파는 동안 그 우물을 무너뜨려 생매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은 이를 예상하고(!)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한다. 이런 일을 겪었는데도 순은 우물을 파라는 말에 반항하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항의하지도 않았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효도를 다했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자기를 죽이려고 한 동생 상에게도 우애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설화 중에는 남동생 상뿐만 아니라 여동생도 하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여동생은 부모와 작은오빠만큼 인성이 글러먹진 않아 순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큰오빠를 죽이려 한다고 미리 알려주었고 덕분에 순이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출처:민음사 《중국신화전설》)]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그런 계모 치하에서 참고 지내느냐?" 라고 묻자 순은 >"아버지께는 어머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요가 허유에게 양위하려다 거절당한 뒤, 순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딸 두 명을 모두 순에게 시집보냈다. 순과 요의 두 딸은 흠잡을 데 없이 원만한 부부 생활을 했으며, 요는 이를 보고 마침내 순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왕위를 선양했다고 한다. 순은 선양을 받아 왕이 된 후에도 부모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였으며 동생은 제후에 봉했다고 한다. 나중에 순의 진심을 안 부모와 이복동생은 자신들이 저질러온 짓을 반성하고 순과 화해했다. 《[[한비자]]》에서도 36편인 <논란>편에서 유가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여산의 농부들은 밭고랑을 서로 침범하고 있었다. 순이 가서 경작을 하니 1년 뒤에는 밭고랑이 바르게 되었다. 황하 강변의 어부들이 낚시터를 두고 다투었는데, 순이 가서 낚시질을 하니 1년 뒤에는 손윗사람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이(東夷)의 도공이 만든 그릇은 품질이 나빴지만, 순이 가서 그릇을 만드니 1년 후에는 그릇이 훌륭해졌다. 공자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감격해서 말했다. >"농사나 어업이나 그릇 만드는 일은 순의 본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 가서 작업을 한 것은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순은 실로 어진 사람이다. 스스로 경작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성인의 덕에 의한 교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 참고로 유명한 고사인 [[모순]]이 바로 36편인 <논란>편에 나온다. 한비자의 주장은 요가 성천자였다면 당연히 나라의 법률을 통해서 기강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순이 쫓아다니면서 그런 '교화'를 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느냐는 것. 다시 말해서 순이 그런 교화를 실행해야 했다는 말과 요가 성천자라는 말은 모순이라고 창과 방패의 고사까지 동원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순과 같은 비범한 인격자조차도 한번 교화하는 데 1년이 걸렸는데, 문제 하나 해결에 1년씩 걸린다면 언제 나라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겠느냐면서, 반면 평범한 군주라도 법으로 다스린다면 수많은 문제를 훨씬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니 유가의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평범한 사람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비범한 인물조차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권하는 자들과 국가의 대사를 의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서경》에 따르면 순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성인으로서의 교화에 중점을 두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서경》의 <순전>(舜典)에서 순은 무위(無爲)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법을 적용할 때도 귀양보내는 것으로 오형[* 五刑. 중국 형벌의 기초가 되는 다섯 가지 처벌법이다. 이는 피부에 글자를 넣는 '''묵'''(墨), 코를 베는 '''의'''(劓), 발뒤꿈치를 베는 '''비'''(剕), 거세를 하는 '''궁'''(宮), [[참수|목을 베는]] '''대벽'''(大辟)을 의미한다.]을 용서해주었고 형벌의 적용에는 항상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