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어진]] == || [[파일:숙종추정어진.jpg|width=width=276&height=368]] || || 숙종의 익선관본 추정 어진. || [[일제강점기]] 당시 익선관본 어진이 원본 + 이모본 형태로 총 2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부산 용두산 대화재|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줄 알았지만... '''사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화재 당시 구출한 숙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1본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반이 훼손된 탓에 용모 파악은 불가능하며 오른쪽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해당 어진이 원본인지 이모본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어진의 경우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있었고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아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해당 어진을 숙종어진으로 추정하게 된 결론의 근거이다. >관모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곤룡포를 입었기 때문에 익선관을 착용한 어진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은 조선시대 어진 제작 연대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태조와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문석이 아닌 채전을 그렸다. 채전이 화문석으로 바뀌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화문석의 용문양을 순조어진([[1830년]] 도사)과 철종어진([[1861년]] 도사)을 통해 분석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용문양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묘사, 채색이 정교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이 어진의 크고 거친 용문양은 순조어진보다 더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으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다.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은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어진이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궁중서화Ⅱ_소장품도록 제14책,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44쪽 열성어진에서도 간략하게 그려진 숙종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은 대체로 조선의 공식 어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 초상화 또한 숙종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 [[파일:external/librewiki.net/%EC%88%99%EC%A2%85.png|width=width=276&height=368]] || ||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