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정공주 (문단 편집) == 생애 == 1646년(인조 22) 당시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효종(조선)|봉림대군]]이 다음 동궁으로 결정되었으나, 책봉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공주는 봉림대군의 사저인 어의동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산실까지 쫓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시 이조 판서였던 이식이 한탄했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9월 9일 정사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09009_001|#]] ] 1652년(효종 3) 8세가 되자 숙정(淑靜)의 작호를 받고, 1656년(효종 7) 12세에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정치화의 양자가 된 정재륜과 가례를 올렸다.[* 부마간택시에 정재륜, 원몽린(초명 원몽치), 변광보가 경합했는데 정재륜이 최종 간택되었다. 이후 원몽린은 숙정공주의 동생인 [[숙경공주]]의 남편이 되었고, 변광보는 소현세자의 3녀 [[경순군주]]의 남편이 되었다 ] 정재륜은 고조부가 정유길인데, 정유길은 인선왕후의 외조부인 [[김상용]]의 외조부이다. 즉, 정재륜과 인선왕후는 8촌간이 된다. 언니 [[숙안공주]]와 마찬가지로 안하무인격에 남의 토지와 세금 등을 빼앗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307013_002|참고 1]]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412022_004|참고 2]]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고, 사대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으나, 그녀는 아버지 효종과 오빠 [[현종(조선)|현종]]의 보호를 믿고 계속 비리를 저질렀다. 1668년(현종 9) 23세 나이로 [[요절]]했다. 현종은 여동생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군포시]]에 있다. 3남 2녀를 낳았으나 1남[* 정효선(鄭孝先, 1663년 - 1680년)] 1녀[* [[김석주]]의 아들 김도연(金道淵, 1664년 - 1689년)과 혼인. 김석주의 아버지는 김좌명으로 [[대동법]]을 주창한 [[김육]]의 장남이다. 김육의 차남이자 김좌명의 동생이 [[김우명]]으로 그의 딸이 현종 왕비 명성왕후 김씨이다. 김석주와 명성왕후 김씨와는 사촌이며 김도연은 5촌 조카이다. 숙정옹주와 명성왕후는 왕실로는 시누가 되며 시가로는 사돈이 되는 셈이다.]만이 살아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