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카르노 (문단 편집) == 건축가로서 ==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수카르노의 주 수입원은 건축가로서의 업무였다. 1926년 반둥 기술대학을 졸업한 수카르노는 대학 시절 친해진 친구 안와리(Anwari)와 [[반둥]]에 건축사무소 '수카르노 & 안와리'(Soekarno & Anwari)를 개설하고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반둥 건축사무소 시절 수카르노는 주로 반둥에서 주택 여러 채를 지었다. 이때 수카르노는 반둥 기술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쳤던 은사인 네덜란드인 건축가 볼프 스후마커르(Wolff Schoemaker, 18821949)에게 건축 실무를 배웠고, 스후마커르와 합동으로 설계를 하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스후마커르 등의 영향을 받아 건축에서 모더니즘과 합리주의를 선호하였다. 수카르노는 독립 후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위신을 여러 기념비적 건축물을 지어 드높이고자 했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도 대형 건축 프로젝트의 기술 감독을 겸직하는 등 건축에 자주 관여하였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바빴던 수카르노가 직접 세부 설계까지 한 경우는 드물지만, 여러 건축물의 입지 선정, 설계, 시공 전체에 걸쳐 조형적,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해 꼼꼼히 간섭하였다. 주로 프리드릭 실라반(Friedrich Silaban, 19121984), 수다르소노(R.M. Soedarsono, 19332018), 수유디 위료아트모조(Soejoedi Wirjoatmodjo, 19281981) 등 인도네시아의 1세대 건축가들이 실무를 맡아 설계해오면 수카르노가 직접 검토하고 수정하는 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수카르노가 관여한 건축물로 대표적인 것만 들어도 자카르타의 모나스(모나스 타워), 이스티클랄 성원(Masjid Istiqlal)[* 이 모스크가 자카르타 대성당과 임마누엘 교회 인근에 위치하게 된 것도 종교적 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카르노의 안배였다.], 신흥국 회의 빌딩(Gedung CONEFO), 사리나(Sarinah) 쇼핑 센터, 호텔 인도네시아(Hotel Indonesia) 등이 있다. 가령 모나스는 처음에 설계 경기에서 수카르노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 없자 프리드릭 실라반에게 설계 초안을 만들어오게 했는데, 수카르노는 실라반의 설계 초안을 보고 링감[* 힌두교 조형 문법에서 시바 신의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물.]과 요니[* 링감과 한 세트가 되는 여성적 원리(샥티)의 상징물.]의 형상으로 기념탑을 지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실라반에게 이에 맞게 설계를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실라반이 새로 설계한 안은 너무 거대한 나머지 건축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고, 실라반이 설계안 축소를 거부하자 결국 수카르노는 수다르소노에게 설계 변경을 맡겨 완성시켰다. 오늘날의 모나스는 최종적으로 이 수카르노-실라반-수다르소노 설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