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카르노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220809.jpg|width=100%]]|| || '''[[수라카르타]]에 위치한 수카르노 동상''' ||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독립 이후 [[독재자]]가 되어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다가 결국 [[수하르토]]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건국 영웅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격하당하지는 않았고 표면적으로 대접해주는 '척'은 했으며 70년대 초반에 수카르노를 격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반발 끝에 좌절되었다. 수카르노가 초안을 제시한 [[판차실라]]를 수하르토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이용해먹은 건 덤이었다. 수카르노 정권의 세부 치적은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실질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된 이후 [[골카르]] 등 수하르토 후예들이 보수 [[우파|우익]] 세력을 대표한다면 [[민주항쟁당]] 등 수카르노주의자들은 [[중도좌파]]에 위치해 있다. 수카르노 본인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고, 게다가 독재적 성향도 있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자]]라고 보기는 더 어렵다. 인도네시아 독립에 큰 공헌을 했으나, 중재능력이 썩 훌륭하지는 못해서 결과적으로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혼란이 이어지자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Guided Democracy)'에 기반해 국회의석의 1/2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는 방식의 독재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문화 정책 면에서는 각종 학술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고 대학과 연구 기관을 어느 정도 확충하였으며, 새로운 국가의 국어로서 [[인도네시아어]]를 진흥하여 수카르노 시대에 문학 창작, 언어학 연구, 세계 문학 고전의 인도네시아어 번역이 정치 기구 또는 국가 기관 주도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업적이 있다. 그러나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반서방 경향을 드러내 인도네시아로의 서구 대중 문화(음악, 영화 등) 유입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점은 평가를 깎아먹는 부분이며, 수카르노 시대의 문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문화를 과도하게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는 한계도 있다. 경제 정책 면에서는 일부 지지자들의 쉴드도 있지만 보통은 실정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무리하게 통화량을 증가시킨 결과, 1960년대에는 물가상승률이 매년 100% 이상을 기록했고, 인프라 투자도 미흡해져서 경제발전이 침체되는 결과를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