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문단 편집) === [[제20기계화보병사단|(구)제20기계화보병사단]]과의 라이벌 관계 === [[제20기계화보병사단|(구)제20기계화보병사단]]과는 경쟁심리가 강한 편이었다. 합동훈련이라도 하는 날엔 기를 쓰고 이기려 들며, 정작 그쪽 군인들이 싫어하는 '"양기사'"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20사단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본래 양기사의 뜻은 양평에 주둔하고있다고해서 '''양'''평'''기'''계화보병'''사'''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며, 20사를 놀리는 의미가 강한 별명이다.] 수기사 병사들이 20사를 양기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수기사니까 그쪽도 양기사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인데, 자기들 기준에 맞춰서 남을 부르는데 당사자가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마치 [[연고전]] [[고연전]]처럼. 물론 이런 성향은 20사단도 마찬가지로 수기사에서 싫어하는 [[빵(동음이의어)|빵]]사단이라느니 [[공|꽁]]사단이라느니 [[씹|X]]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쩌다 파견 때문에 두 부대원이 모이기라도 하면 서로를 '살쾡이--치토스--', '자일리톨'이라고 까기도 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이 심하게 존재하여 파견나간 수기사 병사가 훈련 중 버린 입맛을 돋우기 위해 PX에 가면 수기사 소속이라면 물건을 안 파는 경우도 있었다. 라이벌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알고 있지만 주로 많이 나돌고 있는 설은 12.12사태. 당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육군 유일의 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12.12사태 당시 수기사는 26사단과 함께 충정부대(수도권의 시위, 쿠테타 진압부대)로 유사시 수도경비사령관이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었던 [[장태완]]이 가장 먼저 찾았던 부대였다. 반면 쿠데타 주역인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20사단은 자연스레 반란에 가담했다. 수기사는 작전처에서 포탄 적재계획/수송계획 등 출동계획까지 세웠으나 최종적으로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단 보안부대장 최우천 중령의 설득으로 출동계획이 폐기된 후 사단장 손길남은 취침에 들었다. 출동했어도 육사출신 수기사 포병단장 김도수 대령이 이미 포차로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드를 새워 뒀기에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다.[* 12.12 쿠데타를 논할때 굉장히 중요한게 전두환, 노태우같은 장성급들만이 아니라 그 뒤를 뒷받침한 대령, 중령들이다. 연대장, 대대장, 참모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무담당자로서 일선에서 부대를 이끌고 비하나회 장군들을 회유했다. 이들이 없었으면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출동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9사단 29연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시킨 이필섭 대령과 노태우의 출동명령을 이필섭에게 하달한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 26사단장 배정도를 회유해 출동하지 않게 만든 26사단 보안부대장 김현 중령, 끝까지 저항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 등이 대표적이다. 2017년 알자회가 이슈가 되었을 때 군내에 사조직을 결성했다는 그 자체의 문제와 별개로 제2의 하나회니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일부 네티즌의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했던 이유가 마지막 기수인 43기가 이미 별을 단지라 행동대장 노릇할 대령, 중령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알자회엔 전투부대 지휘관이 강원도 1군 지역의 12, 22사단장 뿐으로 수도권 주변 주요부대에 대한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면 알겠지만 이때 수기사에 쿠데타에 동조한 하나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수기사가 보여준 대응도 차량 동원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하나회의 회유가 아닌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명령으로 복귀한 9공수여단과 비교하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지만 어쨌든 충정부대였기에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나름의 명예가 되었다. 사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히 보병사단이었던 20사단이 1981년에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고, 다시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한 다음 수기사를 5군단에서 빼내 20사단과 묶어 제7기동군단이란 공세 지향적 부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계화사단에, 같은 군단에 묶여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최신장비들을 지급받으니 라이벌 의식이 안생길 수가 없었다. 수기사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부대, 20사단은 현존 최강화력 부대[* 최신장비를 현재 가장 먼저 보급받는다. 수기사에 먼저 안 주냐며 궁시렁 대는 현역병, 부사관, 장교들도 있지만 장비교체 시 작업의 주인공은 바로 '''수기사의 인원들'''이다. 전장비(CMI라고 부르며 보통은 전투 지휘 장비 검열로 부른다) 이상으로 현행장비를 말끔하게 수리하고 광내고 도색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채워야하며 이렇게 구형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도 다시 새로운 장비가 오면 생기는 작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행정, 군수, 보급, 지휘는 더 골치를 썩이는 데다 결정적으로 기존의 훈련과 전술을 갈아엎고 새로바뀐 장비에 맞게 새로 교육, 훈련해야 한다.]라는 걸 내세운다. 2006년 그 이전 20사단 전역자의 증언을 따르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은 더 심했다. 물론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느 정도 희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요 장비를 운용하는 장갑차 조종수와 전차 조종수들이 육군 기계화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오는데 항상 수기사 vs 양기사 라고 교육을 많이 하는 바람에 상관없는 다른 부대 기갑조종수[* 수기사, (구)20사단을 제외한 다른 부대 기보사단 인원들과, 기갑여단 인원들]들까지도 수기사 vs 양기사를 알고 있어서 라이벌 매치는 계속된다. 원래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는 [[6.25 전쟁]] 당시 전공으로 유명한 [[제3보병사단]]이었으나[* 6.25 전쟁 당시 원산 입성때는 1군단 소속이었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7군단으로 가기전에는 같은 5군단 소속이었다.] 지금은 그보다는 20사단과의 라이벌 매치가 더욱 더 부각 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간부들이나 이런 거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예나 지금이나 병사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뺑이치기 바쁠 뿐. 사실상 주변에서 계속 얘기하니 괜히 그렇게 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2005~2007년 수기사 1기갑기보여단 출신 경험으로 말하자면 양기사 라이벌 그런 건 복무기간 내내 없었다.(다만 같은 사단이라도 여단 대대마다 성향이 다를 수는 있긴 하다) 1998~2000 년 같은 여단 출신 경험으로는 매우~~~심했다...단 전차대대 와 기보대대 간의 성향이 다르니...18전차의 경우 32전차 와의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했다... 결국 [[국방개혁]]에 의해 20사단이 2019년 해체되어 [[제11기동사단|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되기로 결정되었고 2019년 11월 30일에 제20기계화보병사단이 폐지되어 이 라이벌 관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