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일수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파일:/image/295/2013/12/02/134035575_20131202_131302.jpg|width=350]] 일본 리그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4년, [[삼성 라이온즈]]가 [[김일융]]을 영입하면서 김일융의 전담 포수 겸 트레이닝 코치로 함께 영입되어 한국 무대에 발을 들였다. 백업이라지만 NPB 출신인 만큼 내심 주전 포수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삼성의 주전 포수이던 [[이만수]]의 입지가 워낙 확고했던지라 삼성에서도 후보 신세를 면하기는 어려웠다. 1986년까지 3년간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 활동하면서 1985년 김일융이 25승으로 [[김시진]]과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데 공헌했고, 한편으로는 이만수를 받쳐주는 백업 포수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그리고 14년동안 일본에서 뛰며 쌓은 포수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동료와 후배 포수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줬고, 불펜 포수가 모자랄 때에는 서슴지 않고 불펜에 올라가 투수들의 공을 받아주는 등 음지에서 구단을 위해 최선을 다한 바 있다. 1986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김일융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의 3년간 통산 성적은 '''159경기 출장, 351타수 78안타 타율 0.222, 4홈런 40타점.'''이다. 같은 재일교포 선수였던 [[장명부]]와는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한국에 왔을 때 일본에 있던 가족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던 송일수를 장명부는 "야 '''울보'''야 또 우냐?" 라고 놀렸고, 한편으로 송일수에게 "넌 언젠가 인생의 승자가 될 것이다" 라고 격려해 줬다고 한다. 뒤에 얘기할 두산 감독 시절의 흑역사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야구계에서 현장직 최정점인 감독이란 자리를 한 시즌이라도 맡아 봤으니 그 격려가 현실이 된 셈. 장명부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장명부보다 훨씬 성공한 야구인생을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