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양지인 (문단 편집) == 고사에 대한 전술적, 문화적 논의 == 양공이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한 것은, '''춘추전국 시대 이전의 전술과 문화대로 행동하다가 춘추시대의 전쟁이 본격화 되는 환경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우선 춘추시대 초기까지 전쟁은 '''[[전차(고대 무기)|전차]]'''가 중심이 되었고[* 실제로 손무가 군사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전차의 수를 기준점으로 삼고, 당대의 강대국의 표현을 '만승지국', 즉 1만대의 전차가 있는 나라라고 칭할 정도로 춘추시대 전쟁의 핵심은 전차였다.], 때문에 전차 중심의 송나라군은 지형을 많이 가리는 전차의 특성상[* 비슷한 전술을 쓰던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3세]]도 [[가우가멜라 전투]]때 전차의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평지의 땅을 다시 다졌다는 기록이 있다.] 강가에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서 초나라 군이 평지에 오기까지 기다렸고 추측하기도 한다. 반대로 초나라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 양쯔강의 밀림에서는 전차를 끌 말을 기르기가 매우 힘들다.] 전차보다 보병중심의 군대를 양성했고 양공과의 전투에서도 강을 도하했다는 점에서 보병중심편제가 어느정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시는 전차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전쟁의 중심이 전차에서 보병으로 옮겨가는 시점이었고, 송양공은 이 흐름을 타지 못해 구식 전차 전술을 고집하다가 큰 패배를 당했다는 해석이 있다 혹은 문화적인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원래 춘추시대 이전의 전쟁은 일종의 의례적인 행동이었고 피해보다 명분적 의례적으로 승패가 갈리는 상황에서 양공이 의례적 절차를 위해 이런 삽질을 해줬다는 해석도 있다. 송(宋)은 [[상나라]]의 직계 후손으로 과거의 문화가 짙게 남은 곳이라 더욱 이러한 사례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속임수고 전쟁은 속임수로 성립하는 것이다" 라고 대놓고 말했던 손자가 등장하기 이전인 춘추시대 말 이전의 전쟁은 귀족적 전통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 사실상 관례였다. 귀족적 전통이란 선전포고를 하고 약속된 장소와 시간에서 정정당당히 정면승부를 벌이는 일종의 품위를 뜻했고, 그렇기에 그때는 기만술, 유인책, 속임수 같은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당시 군대의 주력이었던 고대 전차는 특성상 이런 복잡한 술수를 쓰기엔 기동력이나 지형 적응성, 가성비 등이 모두 부족하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좌전>>에는 "모두 진을 갖추고 싸우는 것을 전쟁이라 한다"고 정의했으며, 또한 "견고하게 준비하고 갖출 것을 다 갖춘 뒤에 힘과 기백으로 승부를 기른다" 라고 서술하고 있어 전쟁의 인식론이 춘추시대 말 이전에는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 출처: 손자병법(임건순 저)] 실제로 양공은 마냥 인자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양공은 [[인신공양]]을 하는 제사를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인신공양은 송나라가 상나라의 직계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상나라부터 인신공양이 [[아즈텍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규모가 매우 거대해서 주변국들에게 멸망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의 동네라서 안 좋은 전통까지 그대로 이어받았은 것이기도 하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고, 포로나 죄수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기준으로 2천년이 지나서 쓰여진 [[명나라]] 시대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도 사람을 목 베어 군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대표적으로 적벽대전 직전 오군이 채화의 목을 베어 제사에 썼다.] 이런 의식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 [[순장]]도 무려 [[청나라]]때까지 이어졌고(...)[* 그러나 이는 중도에 끊어졌던 것이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들과의 문화가 뒤섞이며 일시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도 청나라도 초기에만 있었지 이후에는 없어졌다.] 그러나 양공의 경우는 사실 인신공양 제사와는 좀 다른 경우로, 양공이 가장 먼저 회맹을 주최하면서, 우선 주변의 작은나라들을 불러 규합할 생각이었으나, 그 작은 나라들마저 송나라를 무시해서 지각한 제후들이 많았다. 이에 분노한 양공은 엄정함을 보이겠다며 제일 늦게 도착한 증나라의 제후를 삶아버렸다.[* 일설에는 죽이지는 않고 그냥 두들겨패서 흘린 피만 바쳤다고 한다.] 비록 백여년 후 [[손무]]가 왕의 애첩으로 같은 짓을 벌여 명성을 얻지만, 양공의 경우는 너무 성급했는데다가 상대[* 엄밀히 손무는 군율의 엄격함을 강조하기 위해 했던 행위였고 당시 군주인 합려가 애첩들을 손무의 부하 신분으로 무장시켜서 배속시킨 상태였다. 하지만 양공은 국력 자체가 객관적으로 열국 중 강국 반열에 들지 못한 송나라 군주 신분으로 연합체를 만들어 맹주 역할을 할 야심을 갖고서도 본인에 대한 지지표명이 필수적인 구성원들 중 하나라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할 군소국가의 군주가 상대였다.]가 안 좋았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목이는 이에 대해서 "가축도 제사에 따라서 크기를 달리하여 희생 제물로 삼는데 사람을 희생물로 썼으니 양공은 패자가 되기는커녕 제 명에 죽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아무리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에도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이 이어졌다지만 이건 너무했던 것. 이런 면에서는 진짜 과거 예법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삽질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 언급한 공자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후대 유학자들은 양공의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비웃지는 않았다. 유명한 [[맹자]]와 [[제선왕]]의 일화를 보자. 제선왕이 제사에 쓰여질 소가 도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불쌍하니 살려줘라."라고 명령했다. 담당 관리가 "그럼 제사를 지내지 말까요?"라고 묻자 "그건 안되고, 대신 양(...)을 잡아라."라고 명령하니 백성들이 이를 비웃었다. 그러나 맹자는 이것이 바로 인의로움이라고 옹호했다. 모든 일을 바로잡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자신의 행동이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해 최소한의 동정심을 느끼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성선설|인간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마땅히 갖추고 있을 선한 본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맹자가 주장한 이론의 핵심이며, 반대로 말하면 단순히 "양이라고 불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그냥 소를 죽게 두는 게 현명한 거죠."하는 식으로 자기합리화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소시오패스|기본적인 인간성마저 결여된 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의로운 전쟁이 없는 시대"]]에서 눈 앞의 소를 보이지 않는 양보다, 잠자는 새를 날아가는 새보다, 흰머리 난 적군을 그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아군보다 불쌍히 여기는 행동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보여도, 한걸음이라도 더 [[善|인간이 나아가야 할 본질]]을 향해 행동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시절에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 한걸음마저 내딛지 않는 인간이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