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솔론 (문단 편집) == 솔론의 여행과 귀국, 그리고 망명 == 10년간의 해외여행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으나, 솔론이 먼저 이집트를 방문하여 연구 활동을 한 뒤, 키프로스에 머물며 솔로이 건설을 제안하고 감독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집트에서 리디아에 이르는 모든 일정이 망명 이후의 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솔론은 먼저 이집트를 방문하여 그곳의 성직자들의 학문을 공부하며 연구 활동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당시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마시스(아흐모세) 2세를 접견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이후 솔론은 키프로스로 건너가서 그곳의 지역 토착 군주 중 한 사람인 필로키프로스의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환대에 대한 답례인지, 솔론은 필로키프로스의 수도가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나 교통이 불편하고 협소한 지형에 있어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평야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솔론은 해당 도시의 건설을 직접 감독한 뒤 도시를 정비하였다. 그 결과 그 도시는 번영하고 주변에서 많은 인구가 이주하여, 필로키프로스는 다른 군주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솔론 한 사람의 조언으로 인해 필로키프로스가 키프로스의 토착군주들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선두주자로 앞서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로키프로스와 그 도시의 사람들은 솔론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도시의 이름을 "솔로이"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솔론이 리디아의 [[크로이소스]]를 방문했다는 일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크로이소스]]가 ~~자신이 행복함을 인정받으려고~~ 누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냐고 묻자 아테네의 텔리우스로 그는 오랫동안 자식을 훌륭히 키웠으며 평생을 정직하게 살고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크로이소스]]가 그런 고생만 한놈이 뭐가 행복하냐고 하자 솔론은 '''"폐하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미래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 불행이 생기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자 화가 난 [[크로이소스]]가 그를 쫓아냈는데 몇년 뒤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져 나라를 멸망당했는데 그때 키루스 2세는 [[크로이소스]]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 [[크로이소스]]가 솔론 이름만 부르며 엉엉 울자 솔론이 누구기에 그렇게 우냐고 하자 그때 그 얘기를 해 줬는데 그러자 키루스 2세가 죽이는 대신 자기의 대신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연대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론의 집권은 기원전 594년이므로 솔론의 여행은 기원전 580년대의 일일 텐데, [[크로이소스]]의 재위기간은 기원전 560~546년이다. 플루타르코스 역시 연대가 안 맞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다양한 출처들에서 이 일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솔론의 [[크로이소스]] 방문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회담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솔론의 리디아 방문은 그의 10년간의 여행시기가 아니라, 아테네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성립한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등극과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 즉위는 둘 다 기원전 560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솔론은 10년의 여행을 마친 뒤 아테네에 귀국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솔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또 다시 산악파와 해안파, 평야파로 나뉘어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이었다. 전통 귀족의 대표 격인 부타드 가문의 수장 리쿠르고스는 지주와 귀족들로 구성된 평야파를 이끌었고, 알크마이온 가문의 메가클레스가 해안파를 이끌었으며, 솔론 자신의 동료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테테스들이 주축이 된 산악파를 이끌고 있었다. 솔론은 각 파벌의 수장들을 만나 중재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겉으로 솔론의 중재를 따르는 척 하면서도 내심 참주가 되려는 야망을 키우기 시작한다. 솔론 역시 그의 야망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경고와 견제에 들어간다. 그러나 10년간의 정치적 공백기가 있었던 솔론과 달리,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가 주축이 된 민중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의 야심을 도울 동료들도 있었으며, 페이시스트라토스 본인마저 [[프로파간다|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여론을 선동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살라미스 공격의 재개를 요청할 당시 이 능력을 활용하여 솔론을 서포트하였다.] 반면 솔론의 친구들은 현명하고 유능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외국인들이었고,[* 특히 아테네의 종교제도를 정비하였던 에피메니데스가 대표적이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인이었다.] 국내에는 그가 이끄는 세력이 없었다. 따라서 솔론의 경고나 견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BC560년대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살라미스의 영유권을 둘러싼 메가라와의 분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힌 뒤 반대파벌에게 습격당했다고 주장한다. 솔론은 그 내용이 사기극이라고 비난하였으나, 민중들은 솔론의 경고보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선동을 따라, 그에게 호위대의 구성할 권한을 부여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호위대 명목으로 400명 되는 [[정치깡패|친위대]]를 부렸다고 하며, 그의 친위대는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보인다.결국 메가클레스 및 알크마이온가가 도주하여 해안파는 몰락하였고, 평야파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력이 두려워 침묵한다. 결과적으로 기원전 560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참주가 되었다. 당시 솔론은 군장을 싼 채로 회의[* 아마도 아레오 파고스 회의로 추정된다. 솔론은 전직 아르콘 자격으로 아레오 파고스 회의 참석 자격이 있었다.]에 출두하여 참주정의 도래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그 어떤 세력도 솔론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부는 솔론이 미쳤다며 조롱했다고 한다. 결국 솔론은 자신의 무구들을 내던지며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이들보다는 지혜롭고 다른 이들보다는 용감하다고 비아냥거렸는데, 아마도 전자는 산악파를, 후자는 평야파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등극에 대해 유일하게 반대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단 정권을 장악하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자기편으로 회유하려 한 듯하다. 당시 대중에게 그가 솔론과 대립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외견상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으로, 이는 솔론이 아테네의 승기를 잡았던 것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또한 솔론이 빈민층의 참상에 공분을 표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빈민층의 대변자인 것처럼 행동해왔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호위대 창설을 요청한 과정은 솔론의 법률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회유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측근들 또한 자신들이 솔론의 법률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이 그다지 부당한 것이 아니라, 고대 왕가의 후예인 자신에게는 주어질 법한 수준의 특권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면서도 그 특권을 사리사욕을 위해 남용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아테네의 공공복리를 위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활용을 최소한으로 절제하고 있다고 선전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누군가에게 살인죄로 고소당했기에 솔론의 법률을 따라 법정에 출두한다. 그러나 [[방사능 홍차|원고가 결석(?)]]하여 재판은 무산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일련의 공작들로 인해 솔론이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화해했으며, 참주제에 대한 솔론의 증오는 거북함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주제에 대한 솔론의 태도는 단순한 거북함을 넘어서 증오나 경멸 수준이었다. 단편 형태로 전승되는 그의 시에서 그는 참주의 자리에 올라가면 내려올 방도가 없으며, 참주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참주들은 자신들의 동료시민들을 인격적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마치 서로 크기가 다른 돌멩이들처럼 도구적 대상으로 본다고 비난하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이외에도 그는 다양한 이유로 참주정을 비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동료 7현자의 한 명으로 알려진 코린토스의 2대 참주 페리안드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솔론은 당장에 참주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 외에도 다른 7현자들이 솔론에게 보낸 서신들에서 솔론은 참주정을 기피할 뿐만 아니라 증오하는 수준이라서, 참주정 국가에는 발도 잘 안 들이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런 문헌들이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대의 문서관리체계는 아주 엉망이어서, 유명인사의 이름을 빌린 가짜 서신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쯤으로 유명하면 아예 그냥 저술 하나가 통째로 위작인 경우도 있다. 고대세계에서는 솔론도 제법 유명인 축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빌린 가짜 서신이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폭력적 수단이나 정치공작과 선동을 사용하지 않고도 만인의 추대를 받아 간단하게 참주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서슴없이 거절했던 솔론 본인이 참주정 하의 아테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의 명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성립한 이후 해외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솔론이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아테네를 떠나자, 세계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가 탈레스, 비아스, 클레오불로스, 에피메니데스 등에게 슐로스, 밀레투스나 프리에네, 린도스, 크레타 등을 망명지로 추천받았다고 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