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빈 (문단 편집) == 생애 == [[귀곡자]](鬼谷子)라고 불리는 기인의 네 제자 중 하나였던 손빈은 그의 밑에서 수학했고 먼저 하산하여 [[위(전국시대)|위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동문 [[방연(전국시대)|방연]]의 부름에 위나라로 갔으나, 방연의 시기심과 지인들의 참소로 인해 제의 첩자라고 누명이 씌워져 죽음의 위기로 내몰렸다. 이후 손빈은 무릎의 슬개골이 뜯겨나가는 형벌[* 이 무릎 슬개골을 도려내는 형벌을 빈형이라고 한다. 보통 중국사, 특히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유튜브 등에서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를 할 때 손빈이 받은 빈형을 단순히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이라고 잘못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설에는 무릎뼈가 아니라 발뒤꿈치, 즉 아킬레스건과 그 주변을 도려내는 월형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어차피 평생 걷지 못하는 불구가 되는 건 마찬가지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지만.]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방연은 손빈에게 "내 빽 때문에 죽을 거 앉은뱅이 되는 걸로 끝난 줄 알아"라고 했고 손빈은 그저 고마워했다. 방연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출신 컴플렉스가 작용했다는 얘기가 있기도 하고, 귀곡선생이 방연의 인품을 못미더워 해서 손자병법을 성실하고 심성이 착한 손빈에게만 전수해 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손빈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손빈의 이름은 그냥 빈이 아니라 육달월을 붙인 '앉은뱅이 빈(臏)'을 사용한다. 손빈이 앉은뱅이형을 받은 이후에 손빈 스스로가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하산하기 직전 스승인 귀곡자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을 받아 앉은뱅이가 될 거라고 본명인 賓에서 臏으로 이름을 바꿔 주었다는 설도 있다. 방연은 자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손빈을 기르다시피 했는데 이 와중에 손자병법서를 필사하게 했다. 이 상황에서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에서 손빈을 스카웃 해가기 위해 물밑작업이 진행되고, 방연의 계략의 전말을 알게 된 손빈[* 소설 열국지에서는 더 극적이다. 방연은 손빈이 병법 필사를 다 하면 죽일 예정이었는데 손빈을 존경하던 방연의 하수인은 방연의 속셈을 몰랐기에 손빈이 병법필사를 하면 더 좋은 대우를 해줄 것으로 착각하고 병법 필사를 돕지만 본인의 친구에게서 '손빈이 병법 필사 완성시 손빈은 바로 죽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고 손빈에게 친구로부터 들은 방연의 속셈을 다 말해준다. 그 후 손빈은 미친 척하며 본인이 필사 중이던 병법서를 다 불태운 뒤 후술한 미친체를 반복한다. 그리고 손빈을 존경하던 하수인도 그간 방연의 행적에 의협심이 더 자극되어서 방연에게는 '손빈은 극형으로 인해 몸이 약해져서 글을 거의 못 쓴다'고 허위로 보고하며 손빈을 적극적으로 더 도와준다.]은 [[돼지]]우리로 기어들어가 돼지[[똥]]을 먹는 모습까지 보이며 미친 척해서 감시를 느슨하게 만든 뒤[* 이것은 예전에 오왕 [[부차]]에게 개발리고 [[데꿀멍]]하며 억류되어 있던 월왕 [[구천]]도 선보였던 건데 앓아 누었던 부차의 똥을 먹고 그의 병이 나을 거라며 거짓 충성을 보였는데 결국 정말 병이 낫자 감동한 부차는 구천을 풀어주었고 구천은 결국 나중에 복수를 통해 부차를 쳐부수고 승리한다. 이것은 부차의 충신이자 구천을 경계하던 복수귀로 악명높던 [[오자서]]마저도 자신도 이짓은 못 할 거라며 경악하게 만든 희대의 쇼였다.] 방심한 틈을 타 [[제나라]] 사신의 마차에 몰래 타고 도주해 버렸다.--스카웃을 위해 스캇을 했다-- 그리고 제나라 장군 전기의 빈객이 되어 복수를 꾀하는데, 전기가 제나라 왕과 전차 3대를 가지고 [[전차경주]] 내기를 할 때 필승법을 조언하여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가장 느린 전차를 상대의 가장 빠른 전차와, 가장 빠른 전차를 상대의 두 번째로 빠른 전차와, 두 번째로 빠른 전차를 상대의 가장 느린 전차와 대결시켜 2:1로 승리를 얻는 [[삼사법]] 전략. 현대에도 [[e스포츠]]계 등지에서 이걸 [[논개작전|아주 잘 써먹고 있다]]. 이 일로 전기는 손빈의 비범함을 알고 그를 [[제위왕]]에게 추천했다. 위왕은 손빈과 병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조(전국시대)|조나라]]가 [[위(전국시대)|위나라]]의 침략을 받을 때 원군으로 출장,[* 당초 제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손빈은 극형으로 불구가 된 몸이라 합당하지 않다고 거절해 전기를 장군, 손빈은 군사로 삼았다.] 조나라를 직접 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비어 있는 위나라 수도 안읍을 냅다 밟는 전략으로 조나라를 구해냈고, 여기서 유래한 성어가 [[위위구조]](圍魏救趙)~~[[빈집털이]]~~이다. 그 후 위나라는 --자신이 두들겨 패던-- 조나라와 연합하여 이번에는 한나라를 침공하였고 손빈은 이번에도 전기와 함께 출전해 다시 한번 빈집털이 신공을 시전한다. 이에 한나라를 침공하던 방연이 회군했다. 그 무렵 제나라 군은 국경을 넘어 위나라 땅에 들어왔는데 이때 손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 삼진(三晉)의 군사는 원래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제나라 군사를 우습게 여겨 겁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술에 능한 장군이라면 이런 형세를 이용하여 스스로 유리하게 이끌어가야 합니다. 병법에는 '승리에 눈이 멀어 백 리를 가는 군사는 장수를 잃고, 오십리를 가는 군사는 절반밖에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군사가 위나라 땅에 들어가면 첫날에는 10만 명의 밥을 지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게 하시고 이틑날에는 5만 명 분의 아궁이를 사흘째에는 3만 명분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십시오.[* 첨병감조(添兵減竈)/감조유적(減竈誘敵)/감조지계(減竈之計)] 손빈은 거짓 퇴각을 하며 숙영지 밥가마의 수를 점점 줄이는 전략을 구사해 방연이 '우리가 무서워서 탈영하는 놈들이 늘고 있구나' 하고 오판하여 해이하게 만들었다. 위나라 방연은 사흘 동안 제나라 군사를 쫓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불과 사흘 만에 병사의 과반수가 없어질 줄을 몰랐구나." 이에 방연은 보병은 버리고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이틀 걸릴 거리를 하루만에 달려 제나라 군사를 바짝 뒤쫓았다. 손빈은 방연의 일행이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마릉[* 귀곡자가 두 제자를 떠나보낼 때 한 송이 꽃을 가져오라 한 뒤 점괘와 함께 한 가지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방연의 경우는 마두령이라는, 한 번에 12송이의 꽃을 피우는 풀꽃 한 포기를 발견했는데, 캐낸 이후 자신의 꿈과는 맞지 않는 볼품없는 꽃이라 하여 버렸으나, 다른 꽃을 찾지 못해 다시 주워왔다고 한다. 당연히 꽃은 시들었고, 따라서 위나라(시들 萎자와 동일한 발음)에서 12년 간의 부를 얻으리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양을 만나 흥하고 말을 만나 죽으리라'''는 말을 했는데, 방연이 출세를 위해 위의 왕실을 찾아갔을 때 왕이 양고기를 먹고 있었다고...그리고 마릉은 한자로 馬陵이라고 쓴다. 소설 열국지에서는 더하여 방연은 지혜로워서 남에게 잘 속지는 않겠지만 남을 절대 먼저 속이지 말라며 남을 먼저 속이면 그 행보가 인과응보가 되어 남에게 속아서 죽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참고로, 손빈은 국화를 가져왔는데 한 겨울에도 꽃을 떨구지 않는다는 것, 즉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는다는 점괘를 얻었으며, 귀곡자가 남긴 말은 '''[[가치부전|위기의 순간 미친 척하라]]'''였다.]의 어두운 계곡에 있는 고목의 껍질을 벗겨 그 위에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龐涓死於此樹之下)'''라고 적어 놓은 뒤 1만의 궁수를 매복시킨 후 "밤에 불빛이 보이거든 일제히 쏘라"란 명령을 내렸다. 과연 한밤중에 마릉에 도착한 방연은 나무에 써 있는 글귀를 읽기 위해 불을 비췄고, 그 신호를 기점으로 수만 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와 위군은 그 자리에서 궤멸해 버렸다. 이때 손빈의 글을 읽고 남긴 방연의 마지막 말이 걸작. >'''그 앉은뱅이 녀석이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구나!!!''' 혹은 >'''드디어 그 꼬맹이에게 당했구나!!''' 그렇게 무수히 화살을 맞고 [[끔살]]당한 방연에 대한 손빈의 반응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는 방연의 죽음을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설이 반영되어 있고, [[열국지]]에서는 친히 칼을 꺼내어 죽은 방연과 그의 아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는 설이 나온다. 다만 방연의 조카는 살려준다. 하지만 [[손빈병법]]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손빈병법에선 방연을 사로잡았다고 적혀있다. 발견된 내용이 적고 훼손이 심해 해독이 힘든 편이라 상세한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알려졌던 방연의 최후와는 상반된 내용. 발견된 손빈병법이 진본이라고 본다면 손빈이 직접 서술한 것이니 아마도 사로잡았다는 쪽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마릉 전투]] 이후 딱히 전선에 나서지 않고 물러나 병법을 집필하니 그것이 《[[손빈병법]]》.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실존 여부도 분명하지 않아 의심을 하였지만, 70년대 은작산의 한나라 고분에서 손빈이 집필한 죽간이 발굴되어 손무가 쓴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읽히는 건 여전히 손무의 《손자병법》.마릉전투를 승리로 이끈 병법가로서 그 위세와 이름을 떨쳤으나 손빈이 말년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BC 316년이라고 나와있으나 정확한 사망년도 또한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