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기정 (문단 편집) === 초년 시절 === [[1912년]] [[10월 9일]],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現 신의주시 민포동)[* 19대조 승지 손후(垕)가 [[1519년]]([[중종(조선)|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철산군]]으로 귀양을 간 뒤 그곳에 정착했다.]에서 아버지 손인석(孫仁錫)과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밀양손씨대동보 권4 718쪽에 아버지 손인석의 부인으로는 [[밀양 박씨]]만이 등재되어 있고 어머니 김복녀는 보이지 않는다.]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맏형 손기만(孫基萬)과 둘째 형 손기용(孫基用)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이 당시에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고,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담임교사였던 이일성이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시]]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인생이 바뀌었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공식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유럽|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메이지 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한국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