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규용 (문단 편집) == 생애 == 손규옹은 1885년 2월 10일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호만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용연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1919년 3월경 서울에 들렀다 온 손규철(孫奎哲)로부터 <독립신문>을 전달받고 서울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으니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손규용은 이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3월 16일 오전 10시 용연학교 학생 35명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그동안 간직해 온 태극기를 강당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국기는 구한국 건국 이래로 사용해 온 국가의 표증인데, 10년 전부터는 이것을 떼고 일본 국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그러나 머지않아 조선은 독립하여 다시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감격한 학생들은 손규용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운동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상고했지만 7월 26일에 기각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 4월 28일에 출옥했다. 이후로도 북청군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8.15 해방]] 때까지 생존한 것이 확인되었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손규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 손씨]][[분류:북청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