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주 (문단 편집) === [[다뉴브 강]] 유역 중·하류 및 [[발칸 반도]] === '''Haemonia'''[* 이 당시 [[남동유럽]]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은 이 일대에 존재하는 하이모스(Αἵμος) 산맥에서 이름을 딴 하이모니아였다. [[발칸]](Balkan)이라는 지명은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크인들이 하이모스 산맥을 발칸 산맥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지역명으로 확대되면서 19세기 경부터 이 일대의 명칭으로 발칸이라는 단어가 자리잡게 된다.] 로마의 기병 셔틀 2이자[* 로마의 유명한 기병대장들이나 3~4세기의 황제 대부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기병을 장악한 뒤에 황제가 되곤 했다.] 우주방어 지역 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컨커러]]의 [[아틸라]] 캠페인 2번째 장대한 여정에 나오는 로마인 도시는 거의 다 이 곳에 있다.(나이서스-모이시아 수페리오르, 두러스-에피루스, 소피아-모이시아 인페리오르, 테살로니카-마케도니아, [[아드리아노플]]-트라키아) * '''해당 속주''' * '''[[다키아]] 속주(Provincia Dacia)'''[* 118~158년 사이에 다키아 수페리오르, 다키아 인페리오르로 분할되었다가 다시 합쳐짐]: 현 [[루마니아]][* 보통 다키아 하면 도나우강 이북 루마니아를 떠올리지만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 지금의 루마니아는 물론 [[몰도바]], [[우크라이나]] 서부(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역) 및 [[폴란드]] 남부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이다.] 서부. 주도는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현 루마니아 사르미체게투사). 다키아는 1세기까지 다키아 왕국이 존재하였고 로마사에 제대로 언급된 왕 중 하나는 [[데케발루스]]가 있다. 데케발루스는 지정학적 전략적 이점을 이용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로마군]]을 괴롭혔다고.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본격]] 추진한 다키아 정벌로 인해서 [[GG]]를 친다. [[3세기의 위기]] 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 속주의 전략적인 가치가 소진되었음을 깨닫고 265년경에 다키아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미 다키아에 거주하였던 로마 시민들에게는 강제이주 대신에 거취선택의 자유를 주었다고. 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떠난 로마인도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다키아에 남은 로마인도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루마니아는 이들의 후손이 주축이 되었다고 하며 루마니아라는 국명 또한 '''로마인'''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게다가 [[루마니아어]]가 현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루마니아인이 다키아 로마인의 후손이란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로마제국 후기는 물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다키아 방면으로 야만족이 쳐들어오지 않았으며, 동로마 제국 시절까지 포함하면 7~8세기의 [[불가르족]] 침입, [[아바르족]] 침입 정도를 제외하면 다키아 방명의 침입은 없었다고 한다. 설사 이러한 침입이 있었어도 동로마는 곧 도나우 강 방어선을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아우렐리아누스의 다키아 포기 정책은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신(新) 다키아 속주(Provincia Dacia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a]])'''[* 뜻은 아우렐리아누스의 다키아]: 3세기 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 이북의 다키아를 방위선의 선형 문제로[* 유려하게 이어진 다뉴브 강 방어선에서 다키아만 툭 북쪽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영역 대비 국경선이 훨씬 넓었던 탓에 방어의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 포기하고 나서 다키아 지역민들에게 그 땅에 남을 사람은 남게 허락하고 로마 본토로 내려갈 사람은 같이 내려가자고 한 후 같이 내려온 사람들에게 도나우 강 이남의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의 일부를 끌어모아 정착시킨 속주. 주도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도시)|소피아]]). 이후 4황제 시대에 관구 제도로 재편될 때까지 기간도 길지 않은 데다 이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도 거의 없어서 조용히 묻혔다. 로마에게 원래 다키아라고 지칭되었던 곳은 구 다키아 왕국령이었던 다뉴브 이북이었지만, 그곳을 점령하고서 자진 후퇴하며 원 다키아의 바로 남쪽에 정착시켜서 새로운 다키아가 되었기 때문에, 후대 이 지역 일대가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유래와는 상관없이]] '다키아 관구'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 '''[[달마티아]] 속주(Provincia Dalmatia)'''[*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 현 크로아티아 남부 [[아드리아 해]]에 면한 지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이다. 주도는 살로나이[* 혹은 살로나라고도 부른다.](현 크로아티아 솔린)이다. 이 지방의 주요 도시로는 [[스플리트|스팔라툼]]. 보통은 [[라구사]](두브로브니크)를 생각하지만 라구사는 11세기에 건설되었다. 로마에게 정복되기 전부터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일리리아(Illyria)로 불린 지역으로, 기원전 27년경부터 원로원으로부터 일리리쿰으로 불리게 됐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판노니아 내륙을 정복하면서, 이 일대의 해안 지역을 달마티아(Dalmatia)로 부르게 됐고 일리리쿰의 행정조직 사업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제왕교육을 받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래에서 일리리쿰 속주 내 달마티아 속주 분화 작업이 병행실시됐다. 다만, 오늘날 비문해석에 밝혀졌듯, 일리리쿰 내 달마티아 분화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때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네로]] 시대에 달마티아 주둔 병사들이 남긴 글귀를 통해 확실시되고 있다. 분명하게 달마티아 속주로 완전하게 분화된 시기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였고,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말기에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지방에 이어 라틴시민권이 확장된 세 번째 속주가 됐다. [[독일]]의 역사가 [[몸젠]]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달미티아 지방과 그 해안 도서들은 대략 4세기 완전히 로마문화에 동화되었고 라틴어를 사용하게 됐다고 하는데, 현대의 역사가들 역시 몸젠의 조사내용처럼 도시 일대와 시골 및 기타 도서 모두가 라틴어를 사용하고 로마문화에 동화된 시기는 몸젠이 기록한 4세기 무렵 정도가 확실시된다고 한다. *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Superior)'''[* 모이시아로부터 분화]: 현 세르비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서부. 주요도시로는 신기두눔(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및 나이수스(현 세르비아 니쉬)가 있고 주도는 비미나키움(현 세르비아 코스틀라치)이다. *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Inferior)''': 현 불가리아 대부분 지방이자 다뉴브 강의 가장 하류 지역이다. 라이티아-노리쿰-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인페리오르-모이시아 인페리오르-수페리오르로 이어지는 도나우 방위선의 최종착지이며 이 때문에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오이스쿠스, 실리스트라, 이글리차 등 군사기지가 집중되어있어 로마의 [[우주방어]]를 실감케 한다. 주도는 노바이(현 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주요 도시로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도시)|소피아]])가 있다. * '''[[트라키아]] 속주(Provincia Thracia)''': 그리스 동부 및 [[터키]]의 유럽 지역, 그리고 불가리아 남부 지방이다. '''[[동로마]] 시대의 수도권.'''[* 다만 트라키아 일대가 수도권으로서 우월한 지위를 제대로 형성하기 시작한것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한 세기가 더 지나고 나서였다. 자세한 것은 [[레오 1세 트라키안]] 참조.] 주도는 ~~[[비잔티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가 새 수도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주도나 로마제국 주요 도시가 아닌 그냥 소도시였다. 즉, [[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가 [[노무현]]의 원안대로 [[서울]]에서 [[수도(행정구역)|수도]]기능 및 정치적 중심지 기능을 세종시로 모조리 이전했다면, 아마 콘스탄티노플과 위상이 비슷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 최대도시, 아니 유럽 최대도시로 성장하기는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800년대까지 오현제 시기 로마의 인구수를 따라잡지 못했다.~~]헬라클리아 페린투스(현 터키 마르마라 에레을리시), 필리포폴리스(현 불가리아 플로프디브)이다. [[미국 드라마]]를 통해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스파르타쿠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스파르타쿠스|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최종 목적지[* 스파르타쿠스의 원래 목표는 고향인 트라키아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다.]이기도 하였다. 다만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 왕국의 왕자였다는 설은 과장된 것인데, 로마이전의 트라키아는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 이전의 트라키아 지방에 왕국이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고 기원전 5세기 말엽에 오드뤼사이 왕국이 있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물론 그 이전의 그리스인들도 [[트라키아인]]을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 알고있고 촌동네 취급하였다. 즉, 왕국이라봐야 그리스와 교류가 용이한 국경이나 해안 지대에 적당한 규모의 도시 몇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대다수는 내륙이나 산지에서 야만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라키아 부족장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또한 트라키아는 스파르타쿠스 사후에도 오랫동안 촌동네 취급을 받았으며[* 대표적으로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가 있다. 여기서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정복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이 아니라, '''트라키아 [[촌놈]]'''이라는 반[[멸칭]]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oman_imperial_victory_titles|무슨 땅의 정복자, 무슨 땅에서의 승리자를 의미하는 어미는]] '-이쿠스'이다.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같은 집안에서의 인명들이 서로 워낙 많이 겹치다보니, 프라이노멘, 노멘, 코그노멘 다 빼고 아예 이 존칭만으로 특정인을 지칭하게 된 케이스이다. 물론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아를 평정한 후에 클라우디우스 자기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브리타니쿠스]]란 이름을 준 사례도 있지만 이 경우도 영예로운 호칭인 건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트라쿠스보다 후대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고티쿠스'도 고트족에 대한 정복 및 승리를 의미하는 존칭이다. 이 링크에서는 다키아에 대한 존칭이 다키쿠스로 나오고 있으므로, 똑같이 -키아로 끝나는 트라키아에 대한 존칭은 '트라키쿠스'가 된다. 근데 트라키쿠스가 아니라 '트라쿠스'라서 존칭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어쨌든 스파르타쿠스 사후 군인황제시대까지는 약 300년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촌동네 이미지는 여전하였다.][* 참고로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oman_imperial_victory_titles|#]] 해당 링크에서 존칭들은 다음과 같다. Afr'''icus'''(아프리카), German'''icus'''(게르마니아), Britann'''icus'''(브리타니아), Parth'''icus'''(파르티아), Adiaben'''icus'''(아디아베네-상 메소포타미아), Dac'''icus'''(다키아), Sarmat'''icus'''(사르마티아), Frank'''icus'''(프랑크), Armen'''icus'''(아르메니아), Arab'''icus'''(아랍)] [[기병]], [[전사]], [[검투사]] 등 [[무인]]의 산실로 불리었다.[* 이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그리스~헬레니즘 시대 사이에 활동했던 경보병 병과 [[펠타스트]] 때문이었다. 이들은 투창과 작은 방패를 들고 다니면서 척후병 겸 경보병 역할을 담당했기에 그리스 폴리스나 헬레니즘계 왕국들이 경보병 용병으로 흔히 트라키아인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는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이 대신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이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