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주 (문단 편집) === [[브리튼|브리타니아]] 지역 === '''Britannia''' 오늘날의 영국. 정확히 말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가르는 국경선인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남아있다. 로마 속주로 편입된 이후 가난한 속주로 1, 2위를 오갔고, 로마가 410년 로마군을 철수시킬 당시 속주 내 로마 주민들에게 이주를 권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453년간의 로마 통치 기간 동안 서방 속주 중 갈리아, 히스파니아, 벨기카, 게르마니아보다 변방으로 취급받은 동네다. 그래서 5세기 초까지 파견된 총독과 군단장, 관리 모두가 선호하지 않은 속주로 악명을 떨쳤고, 같은 서방 속주민들 사이에서도 변방 중 변방으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날씨는 게르마니아보다 나쁘고, 북쪽에선 칼레도니아인들과 사소한 분쟁이 툭하면 벌어져 골머리 썩힐 사건도 많은 데다 주민들 수준은 게르마니아 지방 로마 주민들보다 상당히 떨어지고 이해하지 못할 문화적 관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가 파견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들은 아그리콜라처럼 현지 사정을 빠삭하게 아는 야전사령관이나, 여러 환경 속에서 그 능력을 검증받은 베테랑 장군, 혹은 빡센 훈련과 엄격함으로 악명을 떨친 인사들이 많이 배속됐다. 기원전 55년과 기원전 54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브리튼 섬을 침공한 이후 로마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윈스턴 처칠]]이 "[[대영제국]]은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침공했을때 부터 시작하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지만,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브리타니아가 바로 속주가 된건 아니고 그 후에 오랜 세월동안 여러차례 정복 끝에 이루어졌다. 브리타니아는 갈리아보다 영토 크기도 훨씬 작고 인구도 적었으며, 로마가 갈리아를 단 8년만에 평정했듯이 마음만 먹으면 브리타니아도 쉽게 정복 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도 브리타니아를 속주 삼기보단 갈리아의 배후 세력 정리 차원에서 정벌한 것이고 그 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전쟁을 끌은 것을 보면 로마 입장에서 브리타니아의 중요도는 인근의 갈리아나 게르마니아, 히스파니아 보다도 떨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기원전 34년 재차 군을 보낼 생각을 했다가 포기했는데, 이후에도 아우구스투스 주도로 기원전 27년과 기원전 25년 브리튼 정복 계획을 수립했으나 그때마다 로마 내부 사정으로 포기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인 3대 황제 [[칼리굴라|가이우스(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지 1년 정도 된 무렵, 브리튼 일대의 드루이드교 문제와 브리튼 내 분쟁이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정복론이 대두하게 된다. 서기 39년 브리튼 일대 켈트족 사이의 분쟁으로 로마의 갈리아 일대까지 재차 불똥이 튀자, 로마 원로원과 군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브리타니아 정복이 논의됐고 이번에는 실제 군사행동까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기 40년 당시 황제인 칼리굴라가 직접 갈리아 북부로 로마군 200,000명을 이끌고 가면서 실제 원정 직전까지 그 움직임이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닷길이 험하고, 물자 수송 문제 및 갈리아 기근 문제 등도 겹쳐, 칼리굴라의 브리타니아 원정 계획은 미뤄지게 된다. 이때 그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군 앞에서 충성맹세를 받고 등대를 건설하고, 조개껍데기를 줍게하는 선에서 흐지부지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에토니우스가 "musculi"라고 적은 것을 재번역 과정에서 조개 껍데기로 했다는 것[* 혹은 수에토니우스가 본인이 강하게 비난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칼리굴라를 비방할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도 있다.]이 밝혀진 까닭에, 1990년대부터는 로마 제국 차원에서 브리타니아 정복 계획이 진행됐음이 확인됐다. 이때 칼리굴라는 2개 군단[* 보조군 부대 편제를 2개 군단 수준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을 갈리아에서 편성함과 함께, 브리타니아 정복에 필요한 공성무기 제작, 병참 물자 확보 등을 했다. 하지만 마음 먹고 황제와 로마군 지휘관들이 준비했음에도, 브리타니아 원정 출항 계획은 실패했다. 날씨 사정, 물자 확보, 무기 제작 등으로 실제 계획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리굴라가 이끈 로마군은 갈리아 북부까지 영향을 확대한 브리타니아의 카투벨라니족의 부족장 아드미니우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항복을 받아낸다. 이후 칼리굴라는 현실적인 사정상 로마로 귀환했고, 1년도 못 되어 서기 41년 1월 암살당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복 논의는 일시 중단된다. 하지만 로마는 이 당시 브리타니아 정복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브리타니아의 사정 역시 로마에게는 시한폭탄 같은 문제였다. 따라서 서기 43년, 칼리굴라의 숙부로 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이사르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집권자 대수로는 5대째 미루던 브리튼 정복 전쟁을 선포한다. 그는 조카 칼리굴라와 함께 대략 서기 39년 겨울부터 약 3년 반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준비한 브리타니아 전쟁을 현실로 옮겼다. 이때 로마의 명분이 된 것은 브리튼 일대의 켈트족들이 정치적 망명 후 로마의 개입을 요청한 일이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은 시작부터 황제 개인의 야망 실현이라는 일부 고대 기록의 주장과 달리, 로마의 준비는 철저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이전부터 상당한 시간을 두고 철저히 준비하고, 칼리굴라 생전부터 수뇌부 일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로마 지도층 전체에서 수십년간 정복 필요성을 논의해온 전쟁인 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개인적으로 군사적 승리와 업적에 대한 열망이 큰 점 등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데, 4개 정규 군단과 그에 버금가는 보조군 2개 군단 정도가 참전한 전쟁이었다. 여기에 더해 서기 43년, 4개 군단이 참전한 원정군의 지휘관 편제 역시 1세기 로마군 내 명장들이 다수 출전했다. 실질적인 로마군 야전사령관으로는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임명되었고, 칼리굴라의 측근으로 칼리굴라의 갈리아 원정 당시부터 직간접적으로 참전한 [[베스파시아누스]] 등 당시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들이 참전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떠나, 오늘날의 [[런던]]에 당도할 무렵, 황제는 전투 한 번 치루지 않고, 브리타니아의 11개 부족들에게 귀순을 받는 형태로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편입시킨다. 브리타니아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속주가 되었을 당시, 처음에는 오늘날 [[런던]]과 잉글랜드 남부 일부만 확보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서기 44년, 제2군단 아우구스타를 이끈 군단장 베스파시아누스을 필두로 한 원정은 엑서터까지 진군해 점령하고, 제9 군단 히스파니아 군단은 이보다 더 북상하는 형식으로 섬 전체를 넓히는 노력을 하면서 확장에 진력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서기 54년 저녁 식사 후 급사한 뒤, 즉위한 [[네로]] 치세 아래에서도 로마의 브리타니아 속주 확장 조치는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벌인 조직적인 고리대금 사업, 인신매매, 납치 등의 결과, [[부디카의 난]]이 벌어지게 됐다. 하지만 로마는 퀸투스 베라니우스가 새 총독을 맡아 웨일스 일대를 평정하고, 뒤를 이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60년 모나(현재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 성지를 파괴하면서, 61년 부디카 여왕의 저항 등 속에서도 잉글랜드 전역과 웨일스 지방을 자신들의 속주로 만든다. 이후에도 여러 황제들 치세 아래에서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삼부자의 칼레도니아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실패한다. 따라서 서기 410년 로마가 브리튼 섬을 최종 포기하기 전까지 로마가 스코틀랜드까지 차지한 적은 없다. [include(틀: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 '''해당 속주''' *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Britannia Superior)'''[*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도중 처음으로 브리튼 섬에 상륙한 지역이다.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이 카이사르가 영국에 발 놓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남겼지만, 실제 속주화 된 건 약 1세기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다. [[주도(행정구역)|주도]]는 론디니움(현 영국 [[런던]]). 한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까지 로마제국의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이 추가된 영토는 훗날 서기 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로 분화되었다. *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Britannia Inferior)'''[*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 브리튼 섬 중 위에서 언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된 영토.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남부를 포함하며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분화하였다. 주도는 에부라쿰(현 영국 [[요크]]).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칼레도니아]](Caledonia)''': 현 [[스코틀랜드]] 일대. 남부를 넘어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 여러 황제가 나섰으나, 실패하거나 정복 완료 전 죽어서 흐지부지되었다.[* 다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 [[글래스고]]와 [[에딘버러]]를 잇는 선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는 현 스코틀랜드 남부 지방이다.] * '''[[히베르니아]](Hibernia)''': 현 [[아일랜드]] 일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칼레도니아와 같이 정복하려 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