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혜왕후 (문단 편집) === 연산군 즉위 이후 === [[1504년]](연산군 10년) [[1월 8일]], 인수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을 온 신하 박열을 통해 "내가 이미 늙었고 본 것도 많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연산군|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饌]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고기|육선]][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를 전후로 대비의 건강이 위중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연산군|왕]](王)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안양군|손]][[봉안군|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연산군|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안양군|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연산군|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폐비 윤씨|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엄씨]]·[[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갈|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야사(역사)|야사]] 중 이미 광분해 날뛰던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향해 뛰어가 머리 박치기를 하였고 그 충격으로 [[죽음|승하]]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단순한 [[야사(역사)|야사]]에 불과하다. 깊어진 병세에 정신적 충격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실록에 안 올렸을 리가 없다. [[연산군일기|실록]]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은 명백하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의 소생 [[안양군]]과 [[봉안군]]의 생 머리카락을 잡고 인수대비에게 질질 끌고 가서 "왜 제 [[폐비 윤씨|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나와 있다. 단순히 인수대비에게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지른건지, 아니면 쌍욕을 섞어가며 [[패드립]]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연산군]]의 상태나 실록의 서술적 특징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 [[인조실록]]이나 [[영조실록]]같은 경우 각각 며느리와 아들에게 하는 모진 말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적는 것이 특징인데 그 정도가 너무 과한 경우 상황만을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묘사하는 것도 또한 특징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투정으로 끝났다면 그 말들을 [[중종(조선)|중종]] 대에 들어서 사관이 안적었을리가 없다. 이날 [[연산군]]의 깽판은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다.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에 [[죽음|승하]]하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전엔 할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윤기무'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 전말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던지라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도 연로하신 분들 중에 정정하던 사람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속히 건강을 해치거나 심하면 아예 세상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인수대비는 위에 나온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손자 [[연산군]]이 직접적으로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이 일이 인수대비의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극에서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