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혜왕후 (문단 편집) ===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 [[성종(조선)|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경세자]]가 요절하였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한씨는 21살이었다.[* [[야사(역사)|야사]]에 [[단종(조선)|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자 이 말을 믿은 [[세조(조선)|세조]]가 [[현덕왕후|형수]]의 무덤(소릉)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역사)|야사]]와 달리 [[단종(조선)|단종]]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친 행위는 소문대로 실제 있었다.] [[세자빈]] 자리는 [[장순왕후|아랫동서]]에게, 남편의 [[왕세자|세자]] 자리는 [[예종(조선)|시동생]]에게 물려주고 한씨는 '정빈(貞嬪)'이라는 빈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 4살이던 장남 [[월산대군]], 2살이던 [[명숙공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성종(조선)|자을산군]]을 데리고 출궁하였다. 훗날 정빈이 [[원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자식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시부모인 [[세조(조선)|세조]]와 [[정희왕후]]는 농담 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대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조선)|세조]]는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차남인 [[예종(조선)|해양대군]]을 다음 [[왕세자|세자]]로 지목했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효종(조선)|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조선)|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조선/왕사|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왕위 계승의 법칙|적장자 상속제]]가 사대부는 물론 민간 까지 널리 퍼진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때는 이런 종법을 어겼어도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임금들은 [[문종(조선)|문종]]과 [[단종(조선)|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예종(조선)|해양대군]]이 [[월산대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대군]]의 [[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5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왕세자|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예종(조선)|해양대군]]은 8살, [[월산대군|월산군]]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비슷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