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혜왕후 (문단 편집) == 기타 == * [[성종(조선)|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정왕후 조씨]]와 비슷하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 [[혜경궁 홍씨]]의 경우에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 때 장조)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의 일이다. 이 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 효강대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으나 [[사도세자|남편]]이 죽은지 100년, 홍씨가 죽은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 * [[불교]]를 신봉하면서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 전부 통달했다. [[여성]] 행동 교육서인 <내훈(內訓)>을 썼는데 <내훈>에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엄격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며느리의 위치가 보편적으로 이 정도였을 수도 있다. *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배우기 무척 어려운 [[언어]]이다. [[명나라]]를 통해 [[인도]]에서 불경 원본을 반입해 볼 수도 있었겠고 이를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왕비]]나 [[세자빈]]들도 [[한자]]를 못 읽는 경우가 많았고 산스크리트어 [[교육]]용 교재도 적었을 것이므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 인수대비의 큰 고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작은 고모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따라서 [[영락제]]와 [[선덕제]]는 인수대비의 고모부가 된다. 남동생 한치례(韓致禮)는 [[정의공주]]의 차녀와 [[결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