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정방 (문단 편집) === 만주 및 한반도 전선 === 이후 660년, [[고종(당)|당 고종]]이 [[백제]]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을 때 반대쪽의 서역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워버린 소정방이 대총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며, 130,000명의 원정군으로 황해를 가로질러가 백강 하구에서 방어전을 편 백제군을 가볍게 격파해 버리고 전진했다. [[계백]]의 저항으로 인해 신라군과의 합류가 늦어지긴 했으나 [[김유신]]이 계백까지 밀어버리고 합류하면서 사실상 백제의 멸망은 확정되었으며, 이후 압도적인 전력으로 [[사비성]]을 함락하고, [[웅진성]]으로 도망간 [[의자왕]]을 사로잡아 백제를 멸망시켰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 진영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원래는 당군과 신라군이 7월 10일에 만나기로 했으나 계백과 황산벌 결사대의 저항으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4차례 패배한 끝에 승리하면서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국 소정방과 약속했던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이에 소정방은 화가 나기도 하고 신라 측의 기를 꺾어놓을 목적으로 신라를 계속해서 무시하며 오만방자하게 굴었고, 심지어 신라군 장수 중 한 명인 [[김문영]]을 처형하려고까지 했다. 황산벌에서 겨우겨우 백제군을 격파하고 온 [[김유신]]은 소정방의 이처럼 오만방자한 행실에 분개한 나머지 소정방의 면전에서 당장 처형을 취소하지 않으면 >'''“우리가 백제를 정벌하기 전에 네놈들을 먼저 박살 내버리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놀란 소정방은, 바로 김문영의 처형을 취소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김유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신라군이 제시간에 도착을 못한 이유는 황산벌 결사대의 저항도 있었다. 신라군의 합류가 늦을수록 백제군 주력을 상대하는 당군의 피해가 늘어나므로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역정을 낼만도 했다. 동맹군 장수를 처형하겠다는 것은 좀 너무 나간 감이 있지만. 그리고 소정방이 김문영 처형을 취소한 것도 김유신한테 순수하게 겁먹어서보다는,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파트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나 1차 고당전쟁 등으로 중국이 아무리 강한들 단독으로는 고구려를 뚫지 못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2019년에 중국에서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소정방은 이미 659년 출진 준비 시점에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받아서 유사시 신라까지 기습할 계획이 이미 백제 원정 시점부터 있었음이 드러났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이미 이 시점에 당군이 신라까지 공격할 야욕이 있을 거라고 예측해 왕에게 조언하는 부분도 나오는만큼, 이는 단순히 김문영을 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경고였던 셈이다. 《[[삼국유사]]》에도 소정방이 백제 멸망 이후 신라까지 치려고 준비를 했는데 김유신이 이를 간파했다는 일화가 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후 유사시 신라까지 어떻게 해 볼 의도는 있었지만 (김유신의 강경 대응 등이 겹쳐) 시행하지 못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수도 사비성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정복한 기념으로 글을 새겨놓고, 일부 병력만 백제 땅에 남겨 [[웅진도독부]]로 삼아 [[백제부흥운동]]군을 상대하게 하고[* 백제 땅에 남겨둔 당군은 백제부흥군 토벌 목적도 있었지만 신라가 멸망한 백제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나라에 협력하는 백제인과 연합해(그래서 [[나당전쟁]] 기록에서 웅진도독부를 그냥 '백제'라고 칭하는 대목이 많다)[[나당전쟁]] 때 신라와 맞붙지만 패배하고 철수하게 된다.] 소정방과 당군 본대는 다시 [[황해]]를 건너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이듬해인 661년에는 1년 전 백제를 무너뜨린 방식 그대로 다시 황해를 건너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661년)|평양성으로 직행해 포위]]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때마침 평양에 맹추위가 몰아닥쳐 [[대동강]]이 얼어붙자 그 위로 공성무기를 올리고 공세를 취해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평양성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평양성은 대동강이 3면을 감싸 엄호하기에 강력한 방위력을 자랑하는 성이다. 그런데 그 대동강이 얼어붙어 버렸으니... 참고로 이런 내용은 전쟁 종결 후 고구려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한 이야기가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에 부딪혀 자체 전력으로 평양 함락에 실패했고, 튀르크계 [[철륵]]의 반란으로 일부 군대가 빠져나간데다 [[사수 전투]]에서 합류하기 위해 남하하던 [[방효태]]의 군대가 전멸당하자 위기에 빠졌지만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의 목숨을 건 식량 보급을 통해 목숨을 건져 철수했다. 이후 667년, 소정방은 76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소정방은 유주(幽州)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장'(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http://yesan.grandculture.net/yesan/toc/GC06600340|소도독사(蘇都督祠)]]라는 소정방의 제사를 모셨던 사당이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의 임존성 일대에 있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처럼 한국 왕조에 도움을 준 인물도 아니고, 이전의 또 다른 한국 왕조인 백제를 멸망시킨 중국의 옛 장수의 제사를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모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소정방이 백제 정복을 자기의 공으로 자랑했어도, 어쨌든 백제 멸망은 또 다른 한국 왕조인 신라에게도 업적으로 남았고, 후대 왕조들은 백제보다는 신라의 입장에서, 즉 신라 중심적인 사관이 고려-조선으로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