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자성헌황후 (문단 편집) == 두번째 시련과 [[정강의 변]] == 철종은 맹 황후를 폐한 뒤, 그녀를 요화궁이라고 불리는 몇 칸짜리 낡은 집에서 머물며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니가 되게 한다. 이때 맹 황후의 법명은 충진(冲眞)이었고 화양교주(華陽敎主), 옥청묘정선사(玉淸妙靜仙師)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첩여 유씨는 철종이 그렇게 기다렸던 첫 아들 [[헌민태자]] 조무를 출산하게 된다. 곧 그녀가 새로운 황후에 책봉되게 되는데 바로 [[소회황후]]이다. 하지만 유씨가 황후가 된 지 2개월 후에 헌민태자가 갑작스레 죽었고, 곧 이어 아들을 잃고 침통해하던 철종마저 겨울에 감기에 걸려 기침 등으로 고생하다가 [[1100년]] [[1월]] 요절하면서, 철종의 이복동생인 단왕 조길이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송휘종]]이다. 시동생인 휘종이 즉위한 후 [[흠성헌숙황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철종 생전에 밀려나 있던 일부 구법당 세력이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맹 황후 역시 복권되어 선황 철종의 정실 신분으로 황태후가 되었다. 하지만 1년 후인 1101년 흠성헌숙황후가 사망하자 다시금 휘종이 신법당을 중용하고 원우당사건이 터지면서, 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맹 황후는 [[1102년]]에 또 다시 황태후 자리에서 폐출되었다.[* 원부황후([[소회황후]])는 이때 [[채경(북송)|채경]]과 합작하여 원우황후(맹황후)를 내쫓았고 숭은태후가 되었다. 유씨는 휘종의 재위기에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며 야심만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휘종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결국 [[1113년]]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다시 궁 밖으로 쫓겨난 맹 황후는 이후 궁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고, 궁 밖에서 철종의 폐후로 25여년을 힘겹게 살게 된다. 그러다가 [[송흠종]] 때 북송의 수도인 개봉이 금나라에게 점령되는 [[정강의 변]]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상황 휘종 부부와 황제 흠종 부부, 많은 황족들이 금나라 연경으로 압송되었는데, 맹 황후는 철종과 휘종에게 폐출되었기에 황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