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자성헌황후 (문단 편집) == 첫번째 시련 == 철종과 혼인을 하고 황후가 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094년]] 복경공주를 낳게 되었다. 맹 황후는 복경공주를 극진히 아꼈는데, 소성 음력 [[9월]]([[1096년]]) 불과 3살밖에 안 된 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전국에서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써보고 유명한 의원들을 불러 치료했음에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이에 맹 황후의 언니가 소문을 듣고 도사에게 부적을 써달라고 해서 부적을 가지고 오게 된다. 도사는 이 부적을 황제 앞에서 불로 태워서 그 잿물을 이용하면 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송나라에서 부적과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였고 궁중 예법상으로도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그런 의식을 황제 앞에서 하겠다는 건 더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특히 타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한 국가의 국모가, 그것도 유학 교육과 궁중예법, 가법까지 받은 황후가 이런 일은 한다는 것은 부덕(婦德)에 어긋나고 황후 자리에서 탄핵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맹 황후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이를 무릅쓰고, 마침 딸의 병문안을 위해 온 남편 철종에게 어렵사리 말문을 열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허락을 구했다. 당시 철종은 맹 황후에게는 무관심했어도 맹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복경공주는 매우 아꼈기에, 맹 황후가 부적과 주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딸의 병을 낫게 하려는 것을 이해해주었다. 철종은 맹 황후가 어렵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부탁함을 듣고 난 뒤, 부드러운 말투로 '이것은 인지상정이 아니오. 구태여 중궁께서 크게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법과 궁중예법상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앞에서 부적을 태워야하는 주술 의식을 허락하고 당장 집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틀 뒤, 이런 민간요법에도 불구하고 복경공주가 3살의 나이에 죽고 만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은 맹 황후는 죽은 복경공주의 안위와 명복을 기리기 위해 불당을 건립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이게 호시탐탐 황후 자리를 노리던 첩여 유씨에게 빌미를 주고 만다. 출중한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이 악독하고 황후 자리에 욕심이 많았던 유씨는 맹 황후가 불당을 만들고 요승을 불러서 황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철종에게 참소했다. 처음 첩여 유씨가 부적을 걸고 넘어졌을 때에만 해도, 철종은 자신도 이미 아는 일이고 허락했던 일이기도 해서 참소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불당에 요승을 불러 기도를 올린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대노하여 즉시 부적과 불당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조사케 한다. 철종이 친국하는 가운데 맹 황후 주변의 궁녀들과 환관 수십명이 끌러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불로 태우고 혀와 팔다리가 잘리는 등 심한 고문을 방하면서도 궁녀들과 환관들은 꿋꿋히 황후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견디다 못한 몇몇 궁인이 거짓자백을 했다. 이 일로 [[1099년]] '황후가 법사를 부려 황제를 저주했다'는 결론이 내려진 뒤, 맹 황후는 폐해지고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사실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암투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당시 북송은 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래, 과거 원우연간 선인태후의 섭정 아래 정국을 주도한 구법당(원부당인)과 신법당의 대립이 있었고 맹 황후와 첩여 유씨도 각각 구법파와 신법파에 끈이 닿아 있었다. 게다가 맹황후의 친정은 구법당에 속했고, 역시 구법당을 지지하던 선인태후가 직접 선발하여 간택한 황후이기도 했다. 즉, 부친인 신종의 정책과 유지를 계승한 철종이 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침 첩여 유씨가 맹황후의 행동을 문제 삼은 걸 이용해 맹 황후를 쫓아냄으로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법파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힌 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