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식(시인) (문단 편집) == 여담 == [[설니홍조]]라는 사자성어와도 연관이 있다. 소식이 [[소철(시인)|소철]]에게 보낸 답시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가 신법에 반대했던 사실을 두고 여러가지 얘기가 난무한다. [[왕안석]]을 지지하는 측은 그가 지방을 전전하던 과정에서 신법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향했노라 하는가 하면, 반대로 [[사마광]]을 지지하는 측은 오히려 지방 생활 중에 신법의 폐단을 보았으며 왕안석 일파의 위선을 두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예술가로서, 또한 백성을 위해 일한 관리로서 모든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움직였을 따름이다. 시인 뿐만 아니라 [[서예]]가로도 당대제일로 평가받아 미불(米芾), 황정견(黃庭堅), [[채경(북송)|채경]](or 채양)과 함께 북송 사대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서예는 처음 『난정서』를 배우고 안진경의 서예에서 인간성의 발로를 발견하였으나 후에 고인의 모방을 배척하고 일가를 이룬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다른 주변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규보]]는 "학자들이 과거(科擧) 공부할 때는 풍월에 눈돌릴 틈이 없다가,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선 소동파의 시에 푹 빠져버린다"라고도 했다. 시인으로 유명한 소식은 관료로서도 유능한 점이 있는데 바로 [[치수]] 사업을 맡으면 매우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홍수 등 물에 관련한 운영, 관리는 고대 중국 관료에겐 매우 필요한 기술이자 강력한 무기였는데 소식은 이 부분에서 아주 유능하였고 이로 인해 자주 탄핵당해 [[유배]]나 낙향을 전전해도 조금있으면 계속 다시 불려와 지방관 등 관료를 맡아 활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부식]]의 이름 중 '식'(軾)이 소식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동생 이름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蘇轍)로부터 이름을 딴 김부철이다. [[사(문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는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인 정서가 주축이었는데, 남성적, 서사적 정서를 가진 사를 새로 지어 사의 주제가 풍부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식의 사는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수호전]]로 유명한 간신 [[고구]]와 연관이 있다. 원래 고구는 소동파의 서기였는데 글을 잘 써서 소동파가 잘 대해주었고, 후에 권력을 잡게 된 뒤 고구도 소동파의 가족을 잘 돌봐주었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 대한 견해에선 [[조위정통론|위진정통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공융]]을 영웅으로 높게 평가하여 조조는 음험한 도적이자 이리같은 자로 평생 [[유비]]를 두려워 하였고 유비는 공융이 천하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준다는 것에 기뻐하였다, 하늘이 만약 한나라에 복을 내려 공융 곁에 유비가 있었다면 유비가 조조를 베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소식의 정통론이라는게 삼국 전부 정통성도 없고 도덕도 없어 누구도 천하통일 못했으니 힘쎈놈이 정통이다 이 수준이라... [[복어]]를 좋아해서 죽음과도 바꿀 맛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심괄]]과는 동료 관계였다. 그러나 소식이 신법에 반대하여 유배되자 심괄이 그를 임안으로 찾아와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 심괄이 소식을 모함하였고, 소식은 심괄을 뼈속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