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식(시인) (문단 편집) == 생애 == 22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직후 모친 상(喪)을 치러야 했고, 또 그 직후엔 상경하고 얼마 안 되어 아내와 부친 상을 치러야 해서 또 낙향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과거 합격 당시, 야사에서는 차석으로 급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시험관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구양수]]가 소식의 글을 보고 "이건 내 애제자의 글이 틀림없다. 훌륭하지만, 이걸 장원 줬다간 부정 의혹이 일 수가 있다."해서 차석으로 줬다고 한다. 당시엔 부정 채점을 막기 위해서 시험관들이 채점할 땐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고 했었다. 이후 3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는데, 이때는 마침 [[송신종]]의 시대로 [[왕안석]]의 신법 운동으로 인해 조정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때였다. 소식은 국가 정책의 개선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왕안석의 세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속됨 때문에 왕안석 본인에게도 의심을 품고 있었고, 또한 급격한 개혁은 오히려 국정에 혼란만을 가중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일반적으로 소식을 구법당의 일파로 보지만, 그는 구법당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소수파였다. 실제로 후에 구법당이 신법을 일괄적으로 폐지하려 하자, 그는 일부 법은 존속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총동원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오랫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부임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해 명성을 얻었으며, [[남송]] 수도가 될 임안(지금의 [[항저우]]) 지사로 가서 임안을 더 발전시키고 온다. [[동파육]]에 대한 고사(故事)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다 1079년에 지방의 실태를 올린 상소가 신법당 일파의 눈에 거슬려(이때 왕안석은 실각한 상태였다) 파직당하고 문초까지 받았으나, [[송태조|태조의 유훈]][* "선비를 사화(士禍)로 해치지 마라."]도 있고 하여 간신히 목숨은 건져 유배형을 당했다. 이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신선]] 사상 등에도 심취했다고 한다. 후에 신종이 죽고 구법당이 집권하면서 소식은 예부상서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이미 신법의 유효성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권력쟁탈의 빌미로만 이용하는 조정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고, 특히 당시 세를 불려던 성리학자들과 사이가 나빠져 또 귀양을 당했다. 훗날 [[성리학]]을 숭상하는 이들이 이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소식의 시를 추앙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 참고로, 이때 유배된 곳이 [[하이난|해남]]인데 소식 덕분에 해남에 학문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전까지 해남 출신들은 과거를 본다는 것 자체도 생각지 못했는데 소식이 가르친 제자들 몇이 해남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 뒤 [[송휘종|휘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받아 상경하던 도중에 병으로 [[객사]]하였다. 소식 사후 26년 뒤, [[고종(송)|고종]]은 소식을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소식의 손자인 소부(蘇符)를 예부상서로 삼았다. 또한 [[효종(송)|효종]] 시기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