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방서 (문단 편집) == 역사 == [youtube(Lt9-XPLCaOw?t=483)] 조선 시대에는 소방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금화도감'이 있었다. 이는 세종대왕이 창설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pBsJT_UTc|#]] 1426년 2월 15일 세종대왕이 강원도에 감우를 하러 떠난 사이에 [[한양 대화재|한양에 큰 불이 일어나서]] 집 2,200채가 전소되었다. 이는 20,000채 가량 되었던 한성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무시못할 규모였다. 다행히 남아서 집을 보고 있던 세종대왕의 중전인 [[소헌왕후]]가 직접 진두지휘해서 화재 진압을 한 덕분에 [[경복궁]]과 종묘는 무사했다. 세종은 2월 19일에 한양으로 되돌아왔으며 한양에서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그와 동시에 세종대왕은 '''금화도감'''을 설치했는데 이 금화도감이 조선 시대의 소방서였다. 소방관은 금화군, 물을 길어나르는 인원을 급수비라 명명하며 금화도감에 소속시켰다. 하지만 금화도감은 [[인조]]가 필요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이후 한국의 소방서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현재 종로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1981년]]엔 서울 수도권 및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응급환자 수송 전담 [[119구급대]]를 시범발족했으며 [[1982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에 정식으로 119 [[구급차]]를 배치하고 [[119구급대]]를 정식 발족시켰다. 그리고 [[1984년]] 서울 중부/종로소방서, 부산 중부/부산진소방서, 경기 수원소방서, 강원 춘천소방서, 전북 전주소방서, 전남 광주소방서, 충북 청주소방서, 충남 대전소방서, 경북 대구소방서, 경남 마산/진주소방서 등 도청소재지 및 대도시에 [[119구조대]]를 119 특별구조대라는 이름으로 시범 발족했으며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정식 발족을 목표로 대원들을 훈련시킨 후 [[1988년]] 서울소방학교에서 발대식을 열고 정식 발대했다. [[1980년대]]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어 올림픽 준비를 해야 할 시기였으며 전국단위의 구급차 호출번호를 지정해야 해서 [[119]]를 화재, 인명구조, 구급차 호출로 지정하고 [[112]]는 범죄신고, [[113]]은 간첩신고로 각각 지정했던 것. 경찰 측도 이때 대테러부대인 [[경찰특공대]]를 같은 시기 발족해 올림픽 준비를 시작한다. 주요 업무는 화재 예방 및 진압, 인명구조 및 구급업무. 초기에는 경찰 소속이었으나 1975년 8월 26일 내무부 민방위본부 소방국으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다. 때문에 계급 체계가 경찰과 비슷하다. 실제로 소방대원 기동복 역시 국방색으로 군인 또는 전투경찰과 비슷했으나, [[1993년]]에 복제 개정으로 동근무복은 상하의 군청색, 하근무복과 성하복은 상의는 연회색에 하의는 회색, 기동복은 춘추복/하복 모두 청록색[* 구조복은 [[1988년]] [[119구조대]] 창설부터 주황색, 구급복은 [[1998년]]부터 하늘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로 분리.]이었다가 [[2001년]]에 다시 구조복, 구급복, 기동복을 시인성이 강한 주황색으로 통합 변경되었다.[* 경방, 구조, 구급, [[소방항공대]], [[소방정대]] 기능구분 표지장 장착. 서체가 HY울릉도체이다.] 기존 군청색이나 국방색, 청록색, 하늘색이 시인성이 약해 교통사고 출동 같은 상황에서 2차 사고를 자주 당했기 때문에 시인성 높고 119구조대의 유니폼으로 깊은 인상을 주며 각인된 주황색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2010년]]에 다시 경방/구급과 구조 유니폼이 분리되었으며 [[2020년]] 복제개정이 또다시 추진되어 기동복 및 활동복에 주황색+ 타 색상을 섞은 색체로 현재 공모중이다. 현재는 [[대한민국 소방청]]을 중앙조직으로 하며 실무조직으로서 각 시, 도의 직할기관인 소방본부로 되어있다. 과거에는 독자적인 화재 사건 수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2004년]]에 소방방재청으로 승격하면서 포기하고 경찰로 넘어갔다.[* 화재조사의 경우 여전히 소방업무 중 하나이다. 수사권이야 소방공무원은 사법경찰관리가 아니라서 실질적으로 소방에서 다루기엔 무리가 있어서 실제 수사권을 행사하기 위해 [[수사관]] 등을 채용한 예는 없고 관할 [[경찰서]] 형사계에서 형사들이 와서 조사했다. [[방화]]범일 경우 형사들이 신원 확보 후 체포한다. 화재조사는 소방서 소속 화재조사팀이 담당 [[경찰서]] 감식팀과 함께 담당 [[검사(법조인)|검사]]의 지휘를 받으며 실시하고, 보고서 작성 후 경찰서에 제출하며 경찰서에선 다시 지방검찰청 형사부 담당 검사실에 최종 제출한다. 방화/실화/단순화재/범죄 은폐목적 방화 등으로 크게 분류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8년인 1426년에 화재 진압 업무를 맡은 금화도감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나폴레옹]]이 소화 작업을 위해 공병대에서 차출한 사람들이 소방서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소방관의 성향은 마치 군대와 같다고 한다. 실제로 계급도 군 계급을 쓴다. 프랑스 소방구급대 역시 기원이 나폴레옹이 차출한 [[의무병]]들이다. [[중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응급관리부]] 산하에 소방부대가 있는데, 소방부대 아래엔 구조중대가 있어 한국의 119구조대 역할을 한다. 구급의 경우 120으로 호출되는 구급센터에서 별도로 맡는다. 같은 중국이지만 본토가 아닌 [[홍콩|홍콩 특별행정구]]는 [[홍콩 소방처]], [[마카오 특별행정구]]는 [[마카오 소방국]]에서 별도로 담당하며 화재/구조/구급을 모두 담당한다. 근대의 일본, 유럽 등지 에서는 마을 단위로 자경단 등이 소방관 노릇을 했으나 그다지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현대적인 소방조직이 만들어진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일본 제국]]은 [[도도부현]]청의 경찰부(警察部)가 지휘하는 [[도시]]의 경찰 소방대와 [[시골]]의 [[의용소방대]]가 공존했는데, [[일제강점기]]의 소방서는 본토와 식민지의 [[부(행정구역)|부]]와 [[시(행정구역)|시]]에서 경찰관들이 [[구급차]]와 [[소방차]]를 함께 운영하는 '''소방경찰서'''였다. 특히 [[광주광역시|광주부]]를 다스리는 광주경찰서의 경찰 소방대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소방차]]를 동원해 조선인 학생들의 시위를 제압한 [[흑역사]]도 있으며, [[간토 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에 경찰 소방대도 가담했다. 한국인과 어느 정도는 악연이 있는 셈이었다. [[1945년]]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일본 본토를 다스리기 시작한 [[GHQ]]의 명령으로 [[일본 소방청]]이 [[일본제국 경찰|일본 제국의 보통경찰]]에서 분리 독립했다. 소방청 독립 후 새로운 소방공무원을 미국식으로 즉시 양성하면서 [[구급차]]와 [[소방차]]도 소방서 앞마당에 주차했다. 이때 경찰이 조직한 기존의 의용소방대도 모두 해체했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시정촌]] 단위로 새로운 의용소방대를 다시 창설했다. 여기서 보듯이 현대 일본의 소방청은 식민지 통치와 관련이 없으며, 일제강점기의 악행은 [[일본제국 경찰|일본 제국의 보통경찰]]이 [[일본군]]과 함께 했던 짓이다. [[미국]]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필라델피아]]에 세운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보면 훨씬 이후에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일본과는 달리 인터넷에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 당시에는 [[마차]]에 소방 펌프를 장착하여 화재 진압을 하였다. 이후 자동차의 발달로 오늘날의 [[소방차]]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