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론 (문단 편집) === 완론 === * [[최규서]]: 경종 초기 소론의 영수. 서인이 노소로 나뉠 때 소론의 소장파로 활약했으며 최석정의 파직을 막고 [[남인]]에 맞서 장희빈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 앞장 섰다. 병신처분으로 노론이 득세함에 낙향했으나, 경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 연잉군의 청정을 막는 등 소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주역 김일경과 달리 완론의 입장을 펼쳤으며, 고령인 데다가 경종 말년에는 낙향해 정치 일선에 물러난 덕에 최석항, 유봉휘와 달리 영조 즉위 후 노론의 탄압에도 무사했다.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등이 난을 일으키자 사전에 정보를 입수, 같은 소론임에도 고변해 완론 소론을 보호하고 역신 이인좌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천명했다. 그 공으로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이태좌[* 생몰년: 1660년~1739년.]: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현손으로 이광좌의 재종형이다. 어사 박문수의 외삼촌이며 어려서 고아가 된 그를 부모 대신 길렀다. 장희빈 사사에 반대하다가 실각된 최석정을 변호하다가 역으로 삭탈관직됐으며 윤선거 문제로 노론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했으며 신임 옥사에는 형조 판서로 강경하게 노론을 처벌, 탄압했다. 영조 즉위 초 임인옥사 문제로 파직당했으나 정미환국으로 복직해 주요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종성의 아버지. * [[이광좌]]: 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현손으로 이태좌와 재종형제 사이다. 영조 초의 영의정이자 소론 완론 중에서는 강경파에 속한 마지막 인물이다. 경종 때 이미 노론을 탄핵하는데 한몫을 한 사람이고 김일경 급은 아니었지만 제법 강경하였다.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은 명분적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고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더더욱 입지가 좁아진다. 이때 이광좌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고 분무 원종 공신 1등에 봉해졌다. 탕평책의 신봉자였으나 당시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정호가 노론 역사상 송시열 이후로 최고의 강경파인지라 노론들에게 광좌놈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영조가 직접 노론 신하들을 불러서 대신에게 무엄하게 무슨 짓이냐라고 야단을 쳐도 노론 신하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어린애들도 광좌나 광좌놈이라고 부른다라고 지지않고 맞섰다. 다른 소론 대신들이 영조에게 납작 업드린 상황에서도 삼수의 옥은 역적이 맞다고 강변하였고 덕분에 노론의 공적 1호가 되어 무수한 탄핵을 받았다. 4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나, 사직하여 시골로 내려간 기간이 더 길었다. 1740년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영조는 숙종의 사당을 찾아 비를 맞으면서 신하 놈들이 탕평을 하래도 안하고 깽판치니 내가 못난 탓이다! 왕 안 해!라고 선포하자 신하들이 또 우리들이 당파 싸움이나 하면 우릴 벌하소서!라고 울고불며 말린 다음날로 상대적 강경파였던 이광좌의 죽음으로 조정은 그나마 좀 조용해진다. 하지만 영조 31년의 나주 궤서 사건으로 벼슬이 추탈된다. 정후겸의 요청으로 복구되었으나 정조 즉위 이후 다시 추탈되었고 순종때 복구되었다. 여담으로 박문수와도 인척 관계로 그의 후원자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 [[오명항]]: 이광좌, 박문수와 함께 영조 재위 초기 소론 대신의 필두. 영조 즉위 전에는 실무형 관직을 역임했으며, 영조 즉위와 동시에 소론이 대거 실각으로 사직하나 정미 환국으로 복직한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터지자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하라는 영조의 명으로 토벌 총책임자인 순무사에 임명, 종사관 박문수와 함께 공을 세운다.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역신 이인좌와 같은 당색이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을 수 없다고 사직을 요청했으나 영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다. 하지만 그 직후 병사. 효자정문이 있을 정도로 충과 효 모두 뛰어난 명신이였다. * 조문명: (1680년~1732년) 풍양 조씨로 조현명의 형. 소론 온건파인 완론의 일원으로 탕평파로도 분류된다. 경종 시기 연잉군을 보호함과 동시에 과격파 준론의 영수 김일경과 대립한 공로로 영조 즉위 이루어진 소론의 대거 실각에도 무사히 중용된다. 영조의 탕평책의 선봉장으로 송인명과 함께 붕당 타파와 탕평 확립, 노론, 소론 연립 정권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인좌의 난에도 참여해 전공을 세워 공신이 됐다. 탕평 정책에 주력한 탓에 노소론 강경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의 비호로 무사했고, 특이하게 노론 처가와 외가를 두어서 그들과도 각별한 교류를 유지했다. * [[박문수]] * [[조현명]] * [[이광사]] * 송인명: (1689년 ~ 1746년) 소론 완론의 영수이며 영조의 쌍거호대 정책에 누구보다도 부응한 사람이었다. 영조의 정통성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삼수의 옥 문제를 완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국가의 기강을 단속하는데 주력했다. * [[이종성(조선)|이종성]]: 이태좌의 아들. [[박문수]]의 어머니가 이태좌의 누이인데 박문수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외가인 이태좌의 집안에 의지해 자랐고 이종성과 함께 수학했기 때문에 친한 사이였다. 박문수 못지않게 [[암행어사]]로도 유명했다. 이인좌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탕평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서 삭직되기도 했고 영의정 재직 시 [[사도세자]]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처벌에 적극적이던 노론 김상로와 대립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죽기 전까지 사도 세자를 비호했고 사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 세자 문묘에 배향된다. 지략이 뛰어나 반대파인 노론의 중진 유척기가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는 야사가 있다.[* 이때 서로 당색이 달라 같은 방에서도 병풍을 사이에 치고 혼잣말하듯 대화를 했다고 하니 당쟁의 골이 굉장히 심하게 파인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 심노숭의 <자저실기>에도 민진원과 이광좌가 빈청에 동석할 때 사이에 병풍을 쳤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 [[조재호]]: 사도 세자가 죽기 전에 찾았다는 바로 그 사람. 조문명의 아들이자 조현명의 조카이며 [[효장세자]]의 비 효순 왕후의 오빠. 경상도 관찰사,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춘천]]에 은거 중 임오 화변이 터지자 사도 세자를 구하기위해 상경했으나 실패, 홍봉한이 지금 위험한 놈들을 단속해두지 않으면 훗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타진될 것이옵니다라고 상소를 올려 죽일 것을 청했고 결국 사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