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론 (문단 편집) === 준론 === * 최석항: (1654년~1724년) 최석정의 동생. 어려서 숙부 최후원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됐다. 경종 즉위 초 소론 준론으로 신임 옥사를 주도했으며 노론의 선제로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 문제가 조정에 불거지자 비밀리에 경종과 독대로 담판을 지어 철회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광좌, 조태구, 류봉휘 등과 더불어 소론 4대신이라 불리웠으며 이로 인해 노론의 표적이 되어 영조 즉위와 동시에 관직이 추탈된다. 영조 말년에 [[정후겸]]의 요청으로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 심지어는 신축년(1721년, 경종 1)과 임인년(1722년, 경종 2)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5_001|#]]]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 다시 추탈되었고 순종 때 복권되었다. * [[류봉휘]]: (1659년~1727년) 소론 준론이자 강경파. 노론 4대신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자 할 때 강력히 반대하다가 실패하고, 이어 삼사와 노론이 그를 문초하자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조태구가 왕에게 진언해 무마되었다. 대리청정 후에도 연이어 강경한 태도로 극간을 해 청정을 물리고 노론 4대신을 실각시켰다. 영조 즉위 후 탕평책의 일환으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으나 노론 강경파 민진원과 이봉익에 의해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모자라는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경흥에 안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됐으나 1755년 괘서 사건으로 다시 추탈되었고 순종 때 다시 복구되었다. * [[조태구]]: 경종조의 영의정이자 병신 처분 이후의 소론 완론의 영수. 경종 시기의 대리 청정 소동 당시에 우의정이었으며 눈물을 흘리며 대리 청정을 철회한 인물이었다. 이때 노론은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신축환국]]과 [[삼수의 옥]]이라는 초대형 철퇴를 맞는 빌미를 제공한다. 소론 정권이 들어선 후에 빈말로나마 영조를 옹호한 대표적 인물이나 영조 31년에 나주궤서사건이 터지자 역률로 추죄되었고 순종때 복구되었다. * 조태억: (1675~1725) 위의 소론 4대신 조태구와 노론 4대신 조태채의 사촌 동생이였다. 최석정의 제자이다.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도 다녀온 경험이 있다.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했고 소론 집권 확립에 앞장섰으며 사촌형 조태채를 비롯한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몰아 공박했다. 영조 즉위 후 소론 완론의 영수로 준론 김일경을 국문하는 등 준론과는 척을지는 모습을 보였다. 조태구,이광좌와 마찬가지로 나주 괘서 사건으로 1755년 관직이 추탈된다. 이후 영조 말년에 정후겸의 요청으로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정조가 즉위한 이후 다시 추탈되었고 순종때 다시 복구되었다. * [[박필몽]] * 정희량 * [[김일경]] : 급론이기도 하다. * [[목호룡]], [[이인좌]][* [[탁남]] 출신.], 정사효: 모두 [[남인]]이나, 소론 급론, 준론과 입장을 같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