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셰창팅 (문단 편집) == 상세 == [[1946년]] [[5월 18일]] [[타이베이]]시 젠청구(현 [[타이베이]]시 다퉁구(大同區)에서 출생하였다([age(1946-05-18)]세). [[국립대만대학]] 법학과 학사, [[일본]] [[교토대학]]에서 법철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의 [[동양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뒤 '''비교법학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인사 중에서는 [[천수이볜]]도 있었는데, 그와 함께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당시 대표 변호사로써 활약하였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몸을 담기 시작한 것은 [[1981년]]으로, 당외조직[*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만의 정계는 이른바 '''3당 훈정'''에 참가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만''' 합법적인 정당으로서 독점하는 무대였으니, '''블록 정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이들이 연합한 조직이 바로 당외이다.]의 주요 인사로써 타이베이시의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85년부터 다른 민주화 운동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1986년 [[민주진보당]]의 창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창당 당시 당명을 공모할 때 대만민주당과 진보민주당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이 중에서 셰창팅이 제안한 민주진보당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당명으로 선정되었다. 1990년 [[입법원]]에 진출하였고,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천수이볜]]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중화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실시된 직선 총통선거에서 [[펑밍민]] 총통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으나 [[중국 국민당|국민당]]의 [[리덩후이]]-[[롄잔]] 조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바이샤오옌 사건]] 당시 [[인질극]]을 벌이던 마지막 범인과 교섭하여 [[경찰]]에 투항시켜 일약 명성을 날리게 된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 후보로 출마하여 현임 시장이었던 [[중국 국민당]]의 [[우둔이]]를 제치며 당선되었으며, 2002년에 재선에 성공하였다. [[가오슝]]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상하수도 정비를 우선적으로 실시하였고, 당시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아이허]](愛河), 첸전허(前鎮河)와 같은 강을 정비하고 다시 깨끗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밖에도 지하철인 [[가오슝 첩운]]을 기획하였으며, 가오슝 시의 [[낙후지역]]을 [[재개발]]하고(산둬상권이 이때 정비된다), 2009년 [[가오슝]] [[월드게임]]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가오슝 시장 재임과 동시에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간 [[민주진보당]]의 주석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5년 1월, 천수이볜 총통에 의하여 [[유시쿤]](游錫堃)의 후임으로 행정원장에 임명되면서 가오슝 시장직을 사임하였다. 셰창팅 내각은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당과의 직접적인 부딪힘을 줄이고 협상하려는 태도를 취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협상내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2005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에 패배함에 따라 행정원장 셰창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셰창팅 내각은 해산되었다. 그 후 2006년 [[타이베이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40%의 지지를 받으며 낙선하였다. [[2008년]] [[대만]] [[총통]] 선거에 [[총통]] 후보로 [[러닝메이트]] [[쑤전창]]과 함께 출마하였으나 [[마잉주]]-[[샤오완창]] 조에 참패하였다. 당시 마잉주가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을 벤치마킹한 느낌이 물씬 드는 633정책을 내놓자, 셰창팅은 아이허 재정비/재개발 계획을 가지고 [[청계천]]스런 선거 마케팅을 하여 대만에서 뜬금없이 이명박 이슈가 선거전에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공약과 현실은 달랐다는게 함정. 2010년 10월 새로운 양안관계를 외치면서 민주진보당 정치인 중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대만 국민들과 민진당 지지자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2014년]] 민주진보당 주석 선거에 출마하고자 하였으나 [[차이잉원]]을 지지하며 물러났고, 2015년 지방선거에서[[ 타이베이시장]]에 무소속 후보[* 민진당에서는 [[커원저]] 초선 당시 타이베이시장 후보 공천을 하지 않는 등 암묵적으로 커원저를 지원했다.]인 [[커원저]]가 당선되자 시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16년 6월 3일 도쿄 주재 [[타이베이 대표부]] 대사로 정식 임명되었는데, [[http://www.president.gov.tw/Default.aspx?tabid=131&itemid=37483&rmid=514|주일 '대사'라는 직함으로 발표되었다.]] 앞서 이루어진 주미 대표의 '대사' 직함 사용과 더불어, 차이잉원 정부의 대만 독자성 노선의 연장선상이라는 평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