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업적 (문단 편집) === [[언어학]]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글)]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업적이 바로 한글 창제다. 오늘날 《[[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업적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부터 언어와 음운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훈민정음》이 아직 기밀 사안이었을 시절에도 중국어 관련 서적을 탐독하자 신하들이 "전하, 중국어 책은 왜 자꾸 보십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으며, '내가 지금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명나라]]에서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즉시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나라는 [[정통제]]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정통제는 능력은 별로면서 폼은 증조할아버지인 [[영락제]] 못지않게 부렸던 황제였다. 정통제는 '''가오를 살리기 위해''' 오이라트에 쳐들어갔다가 [[토목의 변]]으로 역으로 참패, 황제 본인이 오이라트로 끌려가서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매우 춥고 물도 없는 서역 오이라트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정통제 본인의 황제 놀이(...)를 반성하고 [[탈문의 변]]으로 간신히 명나라 황제에 복위하고 나서 본인의 정통제 시절을 부끄러워하며 '천순제'로 연호를 갈아치웠다. 이후 천순제(정통제)는 [[순장]]제를 폐지하고 전횡을 부리던 간신이나 환관을 숙청하고 부정부패를 줄이는 등 여러가지 업적을 이뤘지만, 이는 조선 세종 사후의 일이다. 천순제(정통제) 본인부터가 복위 이후에 "오이라트에 끌려가 있어 보니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 보이더라"고 했다. 그만큼 반성을 많이 했던 듯.], "중국어 공부를 좀 해놔야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질문을 했을 때 미리 답변을 생각해 놓지 않겠는가?" 라며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반포[* 흔히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이 상소는 사실 훈민정음의 '반포'를 반대한 것이다. 상소를 올렸다가 욕 먹은 때가 1444년 2월이고, 훈민정음을 완성한 때가 1443년 12월이었다.]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매우 크게 분노하면서 일갈을 했다.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난 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원문]] 이처럼 이례적으로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절하게 면박줬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니들이 음운학에 대해 뭘 알고 하냐는 소리다. "니들이 나보다 음운학을 잘 알아? 운서 알아? 사성칠음에 자모 몇 개야? 아는 거 없으면 빠져." 라는 말을 우아하게 한 것. 당대 한반도 최고의 언어학자라고 보아도 무방한 만큼 학문적 성취에 대한 자존심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벌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變)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했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김문, 정창손 등을 비판한 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원문]] 이어서 위와 같이 명했는데, 쉽게 풀어 쓰자면 "내가 그냥 좀 물어보려고 불렀는데 니들 꼴을 보니 안 되겠다."며 정창손을 제외한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투옥한다.''' 김문은 투옥에 추가로 감히 임금 앞에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죄로 의금부 도사의 심문을 받게 되었고, 정창손은 '''[[파직|짤렸다]].''' * 김문은 이전에 세종이 "말 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글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안될 것 없지요"라고 대답했던 사람인데, 이번 상소에서는 언문 제작을 반대했으니 그걸 기억한 세종에게 찍혀서 일종의 [[괘씸죄]]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 참고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민중은 개돼지|"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서구권에서도 귀족이 출신 성분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백성을 무시하는 근거로 잘못 쓰이기도 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공자]] 이후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명목상 천민(노비 등)만 아닌 양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반,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며 계급화된 것은 양란 이후의 일이고, 조선 전기에는 농사꾼 출신 과거 응시자, 합격자도 있었고 세종 대에도 천한 이들 중에도 장영실 등 뛰어난 인재들을 손수 픽업해오기도 했으니 철저한 유학 군주 세종이 대노할 만했다. 정창손의 말대로라면 빈민이던 [[안회]]나 양아치 출신의 [[자로]]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공자는 '''헛짓거리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 최고의 성인이자 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자신이 직접 '''"가르침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논어]] 위령공편)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이때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 평범하고 속되어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한 선비'''"라며 정창손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극에서도 정창손을 꾸짖는 장면이 재현되는데, [[대왕 세종]]에서 정창손이 삼강행실도의 편찬, 보급을 반대하며 백성이 강상의 도리를 지금까지 배우지 못해서 패역한 짓거리를 한 것이 아니라며 타고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자 차분히 반대 토론을 진행하던 세종이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면서 曰 "감히 네 놈이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사람의 천성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네 놈이 정치를 왜 해! 단지 백성 위에서 군림하며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라 일갈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소재로 한 픽션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사람의 천성은 타고나서 바뀌지 않는 것인데 글자까지 새로 만들어가며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론에 대해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대왕은 "네놈이 (그러고도) 선비냐?"며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정창손이 등장하지 않아서 역사와는 달리 [[이순지]]가 [[정창손]]의 발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파직시켰다. 여담으로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신하들의 반대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점은,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대단한 일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엄청나게 부담되는 일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 체제, 즉, 화이 체제에서는 중국은 곧 '문명', 나머지는 오랑캐로 여겨졌고, 조선도 역시 그 '문명'의 기준에 충족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고, 정치적으로도 그 문명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으로 나라의 권위를 강화했다. 따라서, 중국의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쓴다는 것은 문명세계를 벗어난 오랑캐의 문화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조선]]보다 약 6세기 먼저 고유문자인 '가나' 를 만든 [[일본]]조차도 한자를 '마나' 라 부르며 한자가 진짜 문자이고, 가나는 부인이나 천민들이나 쓰는 문자라는 인식이 강했고, 외교문서나 기타 공식적 문서에서는 반드시 한자를 썼다. 대륙과 바다로 떨어져 있는 일본에서조차도 한자를 쓰며 중국의 눈치를 봤는데, 직접 붙어있는 조선에서 느끼는 외교적 부담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일에서 세종은 이전보다 훨씬 신하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가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파직까지 시키는 과격한 대응을 한 것은 다른 사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군주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경하게 나가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강하게 나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낸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발현된 결과로도 보인다. 오랫동안 연구해서 시간과 노력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당시 세종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맡겨야만 했고 눈은 거의 멀어있던 상태였다.] 고생한 끝에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고 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으니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나마 최만리 등은 기술적 문제, 사대 문제 등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근거라도 꺼냈지만, 정창손은 유학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해가며 반대를 했으니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아버지 [[태종(조선)|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대왕 또한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듯 하다. 실제로 이때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의 [[달인]]'''으로 방대한 자신의 지식과 매우 논리적인 언변과 화술로 논쟁에서 신하들을 꼼짝 못 하도록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경연이나 정책회의 등에서 준비도 안 하고 대충 참석했다간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이 먹은 [[갈굼]]처럼 처절하게 논박을 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과거에 붙어도 매일 경전과 서적을 외운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저 꾸짖음에 가까운 논박은 그의 화술 능력을 나타내는데, 원래부터 세종대왕 본인은 경연, 즉, 토론의 달인이었다. 거기다가 본래 세종대왕은 한 번 적재적소에 썼던 인물이라면 그대로 데리고 쓰는 이른바 종신 고용에 가까운 인재 사용을 보여주는데, 황희 정승의 사위사건이나 박연의 부정 축재 등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적당히 덮어주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신하를 다룰 때 웬만큼의 상소문 같은 건 오히려 논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훈민정음에 대한 논박은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것에 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평소 화법은 신하들의 의견에 제대로 경청을 했다가 유교 경전이나 고사 등을 인용하여 학문적 우위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저 논박은 주요 논점을 슬며시 회피하면서 [[피장파장의 오류]]와 [[권위]]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다. 흔히 권위주의라고 하면 민주적인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는 매우 찝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나,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위엄과 위협 모두를 드러내는 제왕식 화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세종대왕의 화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만리의 상소문 6개항 중 4개 항이 모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잘 보면 세종대왕은 중국에 대한 사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두와 구결도 어차피 한자로 만든 오랑캐 문자인데 니들은 퍽이나 오랑캐 문자 안쓰고 중화 운운하냐? 그래서 내가 니들이 못하는 음운학 마스터해서 그거보다 편리한 발음기호 좀 만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냐?" 라는 식으로 억지를 쓰고 있다. 즉 '중국에 대한 사대'라는 논점을 건드리면 문제의 상소에 이름을 올린 자들을 처벌하더라도 다른 선비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이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다소 억지를 써서라도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화도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듯이]] 세종대왕이 평소의 설득 화법을 치우고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을 본 신하들은 깨갱할 수밖에. 왠만해선 화내지 않는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화를 낸다는 건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주특기인 [[숙청]] 스킬을 발동하겠다는 뜻이며[* 사극의 영향으로 세종이 마치 성인군자 내지 철인처럼 여겨지는 인식과 달리, 세종은 정치 방식에 있어 온건한 게 강경한 것보다 나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온건했던 것 뿐, 실제 정치감각만큼은 태종에게 밀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일례로 '''세종은 태종의 처가 공세에 찬동했고, 자기 입으로 상왕과 자신 사이에 있는 간적들을 처단하라 명하기도 했다.''' 북방정벌 때는 장수들의 밥그릇 싸움을 역이용해 전략을 도출하기도 했으며, 심온 사건(자신이 찬동했음에도 불구하고)을 의도적으로 공론화시키지 않음으로서 정치적 최종 방어선을 확보하고 신하들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형을 열 번 구형 가능한 수준의 뇌물 수수죄를 저지른 조말생을 끝까지 보호하고 귀양만 보냈다 다시 등용했을 때이다. 흔히 세종대왕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을 해서 [[집현전]]에서 뚝딱뚝딱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훈민정음에 이미 세종대왕 본인이 창제했음을 밝히고 있고, 훈민정음 발표 이후 놀란 집현전 학자들이 크게 반대를 했다는 점 등만 보더라도 사실상 집현전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종대왕 홀로 한글을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내용은 단 한번도 정설로 여겨진 적이 없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인해 과거 국정 국사교과서에 마치 집현전이 참여한것처럼 서술되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 혼자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811|#]][* [[문명 5/등장 문명/한국|문명 5의 세종대왕 설명문]]에서도 집현전 개발설을 채택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긴 하다.][* 사실 집현전 개발설이 맞다고 해도, 세종대왕의 업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고 위대함도 전혀 퇴색되지는 않는다. 왕 본인이 직접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명령했으며, 이를 적절한 인재들에게 맡긴 결과, 뛰어나고 완성도 높은 결과가 나온 셈이 되니 말이다. [[정복왕|정복군주]]가 [[명장]]들을 시켜 정복활동을 한 것처럼. 왕이 알맞는 신하들에게 일을 맡겨 성과가 나오면 왕의 업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은 이유다. 사실 왕이란 존재는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일에 알맞는 인재를 투입시키는 사람이다. 아마 세상에 집현전 개발설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학계와 산업계 모두에서 프로젝트는 관리와 실무 담당이 협업하는 것이 상식인 20세기, 21세기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세종대왕 개인이 국왕으로서의 관리 업무와 학자로서의 실무를 동시에 처리하며 진행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프로젝트의 구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뛰어난 학자였고, 그와 동시에 평상시 정무를 보면서도 남는 시간에 음운학과 관련된 실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일 중독]]자였기 때문에 [[문종(조선)|문종]]으로부터 받은 실무 도움만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사실상 혼자서 진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집현전의 수뇌부 중에서도 훈민정음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집현전 출신도 많았고, 실제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인 부제학이었다.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도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유포된 많은 세종대왕 위인전에서는 집현전 학자들한테 훈민정음을 만들라고 해놓고, 집현전 학자들이 항의하니 다시 잡아가두는 모순적인 모습도 자주 보인다. 때문에 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훈민정음 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 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글자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라."'''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든 거고, 훈민정음 자체는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맞다. 이렇게 왕이 직접 한글을 창조한 증거로 한글의 완성도를 들기도 한다. 만약 신하를 시켜 만들었을 경우, 기한에 맞추어 최대한 빨리 내기 위해 꼼꼼하게 만들기 힘들었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세종대왕이 언제부터 [[훈민정음]]을 만들겠다 마음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자 창제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있다. 한글 창제의 부수적인 효과이기도 하지만 한글로 외국어를 표기하기가 간편해져서 세종대왕은 [[외래어 표기법|중국어 발음을 조사한 뒤 한글로 외국어 표기를 하여 외국어 교본을 만들었다.]] 덕분에 [[독학|혼자서도 외국어 발음 공부]]가 가능하게 되어 회화 중심의 외국어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특히 구한말 사람들 중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영어를 꽤 잘했다는 풍문이 있었다.[[https://youtu.be/H3hSi7qdYjs?si=Rx__oEfKtwIVogt7|#]] 저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영어교육에 있어 조선시대 교수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재플리시|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문법과 독해 중심의 교육으로 변경]]되었고 지금까지 [[콩글리시|영 좋지 않은 영향이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