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업적 (문단 편집) === [[음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정간보)] >영조: [[선조(조선)|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는가? >원경하: 영묘조(英廟朝)[* '영묘조(英廟朝)'란 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대충 번역하면 '어느어느 릉에 묻히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 가령 [[세조(조선)|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 다만 이는 세종과 세조의 묘호의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예)[[선조(조선)|선조]]→선묘조. 이 경우엔 '무슨무슨 묘호를 받으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이다.] 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선비들만 배출한 게 아니라 예법과 음악을 만들고 정비하던 시대였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박연]] 같은 기술 인재들도 이 시대에 태어나 경쇠[* [[편경]]을 만드는 옥]도 그때에 나왔고, 법율을 만드는 기장도 그 시대를 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 1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601009_001|원문]]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조선)|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 물었다. 이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근데 양녕 본인은 그 기술을 배워서 뒹굴거리는 데 쏠쏠하게 써먹는 바람에 세자 자리를 세종에게 뺏겼으니 어찌 보면 아이러니이다.] 또한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1001_003|원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국방송공사|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해보니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세종의 앞에서 편경을 시연했던 박연 또한 당대 음악적 재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는데, 그런 사람도 듣지 못한 음의 차이를 한 번에 알아맞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이 음감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 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장바티스트 륄리]]가 서양 [[바로크 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 아무튼 인류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작곡가인 다른 사례로는 [[독일인]]들이 존경하는 왕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만 제국]] 후기의 개혁군주 [[셀림 3세]]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