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업적 (문단 편집) == 기타 ==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글씨인 '가전충효 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다른 어필로는 [[2005년]] 10월 9일 서지학자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訪問)'이란 제목의 친필 고문서첩이 있다. 세종 7년(1425) 4월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라고. [[독서]]와 [[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시]] 짓기나 [[서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대표 명필은 아들인 문종과 [[안평대군]]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대왕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세종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하다. 덧붙여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조선)|황희]], [[맹사성]]이 관리 여럿과 짜고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은폐,[* 경위가 어땠느냐면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인 서달이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있었는데 한 아전이 자기에게 인사도 안올리고 갔다며 그 아전을 두들겨 팼다. 그러다가 동료 아전인 표운평이 "언놈이 아전을 패느냐?"라고 했는데 그 때문에 표운평도 얻어맞았다. 문제는 이 표운평이 다음 날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고소했고 정황은 금세 드러났다. 그러나 황희는 동료 정승이자 친구이기도 한 맹사성을 찾아가서(왜냐면 그 일이 일어난 곳이 맹사성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도와달라고 하자 맹사성이 피해자 가족을 불러다가 설득하고 고을 현감에게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했는데 피해자 가족들은 표운평의 아내를 어르고 달래고 했고 고을 현감도 서달을 무죄로 하는 기록을 만들었다.] 조작한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건 정황에 의심을 느끼고 [[의금부]]에 명하여 진상을 규명해냈다.'''[* 조선 최고의 지성 둘이 모여서 만들어낸 사건에, 그들이 직접 썼든 검수를 했든 명백히 손을 거쳤을 보고서를 단 하나 읽고 미심쩍어 수사를 명한 것이다.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다(...).][* 후대의 같은 [[성군]]이었던 [[강희제]], [[옹정제]]도 비슷한 추리력을 보인 기록이 있다. 특히 옹정제는 가히 빅 브라더급으로 밤늦게 마작한 신하가 마작한거 다 알고 그가 잃어버린 마작패 하나를 몰래 입수해 그 신하에게 던져주질 않나 한 신하에게는 출근하는 부서가 잘 돌아가냐고 대답에 잘 돌아간다는 대답을 받자 조금 뒤 거기 현판도 잘 걸려 있냐고 묻자 역시 잘 걸려 있다고 대답했는데...그 신하에게 그 관청의 현판을 집어던졌다. 신하가 진짜 말을 잘 한건지 확인하기 위해 밤늦게 몰래 사람을 시켜 현판을 떼어낸 건데 그것도 모르던 신하는 대충 예 예 거리다가 된서리 맞은 것. 결국 현판은 한 동안 그 관청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결국 황희, 맹사성은 파직. 감사, 5현의 현감, 수사관원, 형조판서는 경중에 따라 처벌받았다. 당사자인 서달은 사형당할 뻔 했지만 형조판서의 아들이 [[독자#s-2|서달 하나 뿐이라]] 낮은 등급으로 처벌당했다. 돌로 서로 때려죽이며 인력을 낭비하는 [[석전]]이 야만스럽게 보였던 건지 석전을 금지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왕명을 어기고 몰래 했던 건지 이후로도 석전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