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업적 (문단 편집) == [[과로]] == 세종은 [[일 중독]]이 심하여 하루에 5시간 수면을 제외하고는 재위기간 내내 업무를 쉬지 않았다. 애초에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시력이 많이 좋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의 편찬이었다. 세종은 이 작업에 굉장한 열의를 보이며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드는 작업이 작은 일일 리가 없다. 게다가 완벽주의자 세종은 사소한 문제점도 내버려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그 때문에 책 편집과 세종 자신의 시력을 맞바꾸었고, 말년에는 시력이 매우 나빠져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자치통감훈은 세종이 죽고 문종 2년(1452)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된다. 세종실록에도 언급되었듯이 세종대왕이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합병증 중 하나인 당뇨성 망막증 등이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세종이 야채보다는 고기를 매우 좋아했던 식성 때문이다. 결국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문종(조선)|세자]]에게 [[대리청정|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대왕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으로 이루었다. 그래서 신병주 교수는 조선의 황금 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본다. 세종대왕이 죽은 원인도 과로인 듯하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자기가 다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까지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보았는데 이때 '''"몸져누운 동안 밀린 정무를 물 흐르듯 한치 오차도 없이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괜히 [[과로사]]한 것이 아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2014_003|《세종실록》해당 부분]] 이 정도라면 능히 [[성군]]이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2014_001|《세종실록》기사]] 왕이 이런데 신하들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다. 오죽하면 세종대왕 좌우명이 '''"[[공무원|신하]]들이 고달파야 [[국민|백성]]들이 편하다."''' 라고 하겠는가. 말 그대로 휘하 신하들을 미친 듯이 굴렸다.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나랏님이고 하늘이 내린 임금이었지만, 신하들에게는 악덕 상사도 이런 악덕 상사가 없었다. 물론 신하들은 좀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인지상이자 한 나라의 지존인 상사가 앞장서서 날밤 새워가며 일하고 있는데 쉬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언변으로도 신하들 위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반박도 못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황희(조선)|황희]], [[조말생]]만 봐도 죄를 짓고 파직되어도 다시 불러들이고 황희는 모친 삼년상 치른다고 낸 사직서는 죄다 반송 처리. 아예 3년상을 치르는 중에 고기를 보내서 3년상 중에 고기를 안 먹는다는 법도를 어기게 했다고 하니.[* 당장 세종 본인도 이걸 안 지켰긴 하지만, 이는 태종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참작되었다.--라기엔 황희는 고기 먹고 건강을 되찾는게 어명이라 고기를 안 먹기도 난감했다--] 노년이 되어 치매가 온 것 같다, 귀가 안들리는 것 같다 등 온갖 사유를 들어 퇴직 요청을 해도 불허했다. 아예 재택 근무 하라고 하고, 짚고 다닐 지팡이에 출퇴근용 가마까지 하사하며 사직을 막았다. 황희가 사직한 건 세종대왕이 세상을 뜨기 넉 달 전이었다. 그나마 황희는 3년간 일에서 해방되어 살다가 90살에 죽기라도 했지, '''[[조말생]]은 업무 중에 [[과로사]]했다.''' 이로 인해 세종이 신하를 극심하게 부려 먹는다는 오해를 받지만, 애초에 조선에선 이러한 일들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면 조선 정치는 노환으로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신하는 그 소임으로서 일생을 국가에 바치는 것이 정치문화였다.--그 말인 즉슨 다른 신하들도 큰 과가 없는 이상 죽을때까지 굴려졌다는 것이다-- 다만 황희와 조말생처럼 특정 관직(영의정, 병조판서)에 오래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맞다. 조선은 관직 회전율이 극히 높아서 정승, 판서는 돌아가면서 역임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정승, 판서 평균 재임기간은 원래 1년보다 좀 적거나 약간 긴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