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업적 (문단 편집) === [[군사학|군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4군 6진)]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대마도 정벌)]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기전)] >'''"화포를 설비했다가 적이 침입하거든 시기(時機)에 응하여 쏘면 열 사람이 적 1백 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 >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 5월 13일 기사 중 [[http://sillok.history.go.kr/id/wda_12205013_005|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화포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전지하다]] 세종 시기의 치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병기 공학에 대한 투자이다. 세종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등을 기용하여 [[화약]] 무기에 대해 연구하게 했다. 이미 [[태종(조선)|태종]] 대에 '''일발 다전법'''을 시도했지만 [[기술]]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했는데 이 당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높여 연사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세종은 독자적으로 기술력을 확보해 일발 다전법을 재위 15년(1433)에 완성했다. 초기 화약 [[무기]]의 발사체는 [[화살]] 1발이었지만 세종 재위 시절에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한 덕에 재위 27년(1445)에는 이총통,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 구경이 8.1 mm~29 mm짜리 소형 화기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었고 세종이 총통을 직접 시험해 위력을 확인한 후 평가를 내린 뒤에 [[평안도]] 일대에 보냈다. 동시에 일발 다전법이 수립되어 발사체가 1개에서 2~12개로 증가했다. 여기서 발사체는 화살(피령목전)이라 철환이 아니다. 초기의 화약 무기들은 강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중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살대와 화살깃을 이용해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도록 했다. 철환이 본격적으로 탄환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화포의 개량과 체계적인 생산 체계가 충분히 이뤄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다. 세종은 화기 운용 부대를 증편하고 화기 사격술을 개량했다. 재위 23년(1441) 6월에 세종은 사수는 사격만 맡고 다른 사람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투원의 수요를 폭증시켜 세종은 다시 재위 27년(1447) 11월에 총통군을 오 단위로 편성해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을 실시한다. 즉, 화기 사격수인 총통군은 5명을 1오로 편성해 4명은 사격을 담당, 나머지 1명은 장전만을 전담하게 했다. 오 내에서 화약의 양, 발사체, 격목의 크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병과별로 선정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와 [[도검]]을 들고 다니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극대화시켰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재위 30년(1448)에 <[[총통등록]]>을 저술해 화약 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 및 규격화했으며 매화법 등 [[지뢰]]를 매설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매화법은 지뢰를 매설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반적인 매설 지뢰와는 다른 [[클레이모어]]와 유사하다. 그 중에는 [[화학]] 물질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 때 개발된 화기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화살을 대신하여 철환을 발사했고 세종이 개척한 일발 다전법은 '''<신기비결>이 저술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사격]]할 것을 권장한다.'''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포탄의 구조로 대략 입구까지 꽉꽉 채우고 발사한다. 대체적으로 세종 집권 시기의 화약 무기를 문종[[화차(무기)|화차]]로 압축하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이 이뤄낸 진정한 화약 무기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의 규격화 및 일반화시켰으며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을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하고 그 부대의 운용 방법을 법제화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병]]이라는 새로운 병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이런 [[중세]] 화약 무기들은 근현대처럼 화학 대량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약이 매우 비싼 상태에서 많은 화약을 요구했고 때문에 [[야인]]들과의 실전에서 화력 [[덕후]]의 기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화력전을 표방하기 시작한 사례는 [[임진왜란]]. 그 외에도 유황이나 초석은 조선에서 생산이 거의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중있게 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세종대왕(문명 5)|막강한 과학의 힘]]은 매우 잘 구현되어 현대에도 남아있다. 거기에 더해 군대 및 부대에 대한 선구안도 상당했던 것이 즉위 15년에 조선의 특수부대 및 부서인 [[체탐인]]을 신설했는데 이들이 하는 업무는 조선과 명을 오가며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하거나 국방에 위해가 되는 요소를 조사 및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였으며 현대로 치면 미국의 [[CIA]],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혹은 [[HID]]의 업무를 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 덕분에 여진족의 침략 등을 막아낼 수 있었고 그만큼 세종의 군사부대에 대한 선구안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보여준다.성종 때 이후로도 체탐인이 사라진 적은 없다. > "임금의 도리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의 충성은 적개심(敵愾心)이 귀하다. '''무지한 이 야인이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毒氣)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의 생명을 살해하여, 고아(孤兒)와 과부(寡婦)가 원한을 일으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쌍하고 슬퍼함을 마지 않는 소이이며, 또한 경들이 가슴을 치고 이를 가는 바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성명(聲明)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에게 아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명하노니, 모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주장(主將)의 방략(方略)을 듣고 적을 쳐서, 꺾는 공을 이룩하여 변경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 >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 3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3022_002|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태종(조선)|태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의 요동 지역은 [[몽골]]족에게 위협을 받았다. 세종 5년(1423) [[요동]] 방면으로 이주했던 오도리의 수장 동맹가첩목아는 몽골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와 조선의 허락을 받아 무리를 거느리고 옛 거주지인 [[두만강]] 유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회령시|회령]](會寧)) 지역으로 돌아왔다. 세종 6년(1424)에는 [[이만주]](李滿住)가 이끄는 1천 호가 달단에 쫓겨 [[압록강]] 중류의 파저강(婆猪江)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조선은 두 집단 중에 명나라와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만주가 이끄는 집단을 이주 초기부터 경계하여 입조·교역 등의 접촉을 제한했으며 따라서 양측의 관계는 순탄치 않게 전개되었다. 조선은 [[여진]]족이 부리던 [[노비]]가 도망해 오면 [[조선인]]은 원래 거주지로 보내고 [[중국인]]은 요동으로 송환했는데 이것이 여진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세종 14년(1432) 12월, 여진족 수백 여 명이 여연(閭延) 경내에 쳐들어 와서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만주는 홀라온(忽剌溫) 올적합(兀狄哈)이 조선인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던 것을 자신이 빼앗아 보호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려 왔다. 그러나 세종은 여연 습격에 이만주가 관련되었다고 확신하고 이만주 세력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월 19일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사전 조치를 강구하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파저강 야인을 정벌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정벌을 감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벌을 단행토록 했다. 최윤덕이 이끄는 원정군 1만 5천 명은 4월 10일 [[강계군|강계]]에 모여 부대를 7로로 나누었다.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이순몽(李順蒙)에게 2515명,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최해산(崔海山)에게 2070명,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 이각(李恪)에게 1770명,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에게 3010명, 김효성(金孝誠)에게 1888명, 홍사석(洪師錫)에게 1110명을 맡기고 최윤덕이 스스로 2599명을 통솔하여 7개 단위로 편제를 마쳤다. 부대는 4월 19일 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여진인 267명을 죽이고 238명을 생포했으며 우마 177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귀국]]했다. 기습을 당한 파저강 여진족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만주의 처도 [[사망]]했고 이만주 자신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는 처지에 놓였다. 반면 조선군은 4명 전사, 25명 부상에 그쳤다. 이것이 제1차 파저강 야인 정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원정군의 철수 후 이만주는 다시금 세력을 회복했으며 조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수 차례 수백~수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범했다. 한편 제1차 파저강 정벌이 이루어진 세종 15년(1433) 10월 두만강 하류의 여진족 [[추장]]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자 건주좌위의 잔여 세력은 올적합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만주가 있는 파저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합세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조선은 이에 긴장했는데 세종 19년(1437) 5월 올량합(兀良哈) 기병 3백여 기가 다시 조명간구자를 습격해오고 비슷한 시기에 건주좌위에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 위해 이만주가 두만강 하류까지 직접 내려오자 세종은 [[김종서(조선)|김종서]]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만주를 토벌하자고 제의했다. 신료들이 명나라와의 관계 및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어 정벌에 반대했으나 세종은 조정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측근 신료들과의 의논을 바탕으로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 등과 함께 가을을 목표로 실질적인 정벌 준비를 개시했다. 제2차 파저강 정벌은 9월 7일 개시했는데 정벌군 총 8천여 명은 3로로 나뉘었다. 도절제사 이천은 여연절제사 홍사석(洪師錫)과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772명을 거느리고 옹촌(甕村)·오자점(吾自岾)·오미부(吾彌府) 등지를 향해 강계에서 강을 건넜다. 상호군 이화(李樺)는 좌군 1818명을 거느리고 올라산(兀剌山)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은 우군 1203명을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아한(阿閒)으로 향하여 모두 이산(理山)에서 강을 건넜다. 정벌군은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불태운 뒤 16일에 돌아왔다. 조선군은 적군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동안 단 1명만이 전사했다. 제2차 파저강 정벌은 여진족의 근거지에 타격을 주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1차 파저강 정벌보다 전과도 적었고 이만주 제거에도 실패했다. 이는 파저강 야인들이 정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정벌의 성과에 대한 평가 및 이천을 비롯한 정벌군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세종은 적을 징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논란을 봉합했다. 2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통해 조선은 압록강 건너의 여진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압록강 중류에 [[4군 6진|4군]]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주본위의 지휘자 이만주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주 제거라는 목표는 결국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