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조선)/생애 (문단 편집) == [[계유정난]]과 즉위 == ([[세종(조선)|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 생명은 끝났다[* 임용한 교수와 박시백 화백 모두 이 문제에서 세종의 실수를 지적한다. 왕의 적자라는 정통성 강한 신분은 역설적으로 같은 항렬의 적장자 유고시 부자간의 왕위세습에 대한 제 1의 위협이었던 사례들로 인해 조카가 연소한 군주 신분으로 즉위하면 현위 군주 친위세력권의 제 1의 경계대상이 되는 경우는 세종이 충분히 역사서적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동북아시아권의 전대 왕조권에서 적지 않았던 선례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적자들의 정치활동참여를 지나치게 시킨데다가 더 중요한 점은 본인의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적자들이 신하들, 그리고 재야 사대부들과 인맥형성을 하는 행위들도 전혀 막지 않았다. 물론 본인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본인이 왕이 된 이유가 본인의 친형 양녕대군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였다는 점, 그리고 언제든 상기한 골육상잔의 역사적 비극은 너무나도 흔했다는 점, 또 도덕성이 결여된 양녕대군이 본인의 형제였던 사례에 비추어서 본인 슬하에도 양녕대군 수준의 인물이 탄생하는 사례를 인지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역사적으로 왕위 자체가 혈육의 정보다 더 매력적인 동기가 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추가적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헌왕후가 사망한지 3년이 지난후에도 계비를 세우지 않은 것이 계유정난을 막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세자인 문종이 어련히 알아서 새로운 세자빈이나 비를 맞이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계비를 맞이하지 않은건 실책이라 볼 수도 있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나 [[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 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이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만약 고명대신-수양대군-안평대군의 [[과두제]] 구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단종이 친정을 하면서 기존 세력을 흡수, 와해시킬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단종의 재위는 안정적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유력 종친인 [[안평대군]]은 스스로 과두제적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제 명을 재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 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 그 후폭풍으로, [[이징옥]]의 발악적인 [[반란]]도 겪었다. 이 사건이 이징옥의 난이다.]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그가 그냥 양녕대군처럼 실권없는 왕실의 어른으로 편하게 살고 싶었다면 자신의 세력을 포기하고 알아서 엎드려서 조용히 살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야망이 있으며, 자기가 가진 힘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문종이 살아있었다면 수양대군으로서 적당히 권세를 누리고 나랏일하면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가 다른 왕족들에 비해 강하다곤 하나, 문종에게 그 정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형이 요절하고 아직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위치가 애매해진 것이다.]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조선)|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 형제들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소성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공신으로 3등 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공신 12명, 2등공신 11명, 3등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사육신|모두들 아는대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