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조선)/생애 (문단 편집) ==== 공신과 외척의 급부상 ==== [[신하]]들을 더 죽이는 것만은 그만하자는 주의였는듯 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이상 죽여댔다가는 [[능력]]있는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당시 실학에 포함되던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의외로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술]]에 과하게 취해서 세조 앞에서 세조를 "너"나 "상왕"으로 부르거나 신하들과 술자리 때 당시의 [[야자타임]] 놀이를 하던 중 하면 안 될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마인드로 바뀌었던 데다 계유정난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킹메이커]]들인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 혜택을 마구 퍼주는 바람에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이 바로 이 토지 혜택 부분으로 세조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하였는데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 대 지나고 나면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회수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세조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조선]]의 고질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다른 공신인 [[권람]], [[구치관]], [[정창손]], [[파성군|이사철]], [[김질]], 박원형, [[박종우]] 등도 큰 [[벼슬]]에 제수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조선)|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문서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여겨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직접 가담자는 죽이고 연좌제로 친족을 [[노비]]로 삼는데 세조는 그 노비들을 공신들에게 나눠주고는 했다. "김 장관댁 며느리가 그렇게 예쁜데 나 주라." "그럼 딸은 내가 가져간다?" 이게 약탈나온 [[도적]]떼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공신들의 대화다. 물론 [[역적]]의 친족을 노비로 삼으면 노비들은 공신들에게 분배되는게 비단 세조 시절의 일만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외척들도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의 집안 형제였던 윤사분, 윤사흔 형제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또 한명회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정인지와도 사돈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외척인 심회에게도 [[정승]] 자리를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예종의 장인인 한백륜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고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과 성봉조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인척인 윤사로, 윤필상 등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과 역시 왕실의 인척인 [[신승선]]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이후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