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속오계 (문단 편집) == 사상적 배경 == 언뜻보기에는 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군이충은 오륜의 군신유의와 다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오계에서는 충성을 강조했지만, 오륜에서는 의로움을 강조했다. 사친이효는 오륜의 부자유친과 다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오계는 효를 강조했다면, 오륜은 친해야됨을 강조했다. 오계 중에서 오직 '교우이신'만이 오륜의 붕우유신과 비슷하다.][* 임전무퇴나 살생유택에서 보듯 싸움에 관한 이야기는 불교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다. 승려로서 하기는 어려운 이야기. 따라서 세속오계와 같은 비슷한 가르침이 신라시대에 이미 전래되고 있었고, 이렇게 전해지는 율법을 원광법사가 정리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교는 삼국통일 이후인 [[신문왕]]이 즉위한 이후에야 [[국학]]의 설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신라사회에 보급된다.][* [[불교]]는 세속오계가 탄생한 진평왕의 재위 당시 보다 불과 30년 전인 [[법흥왕]] 때에야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간신히 공인될 수 있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이 진평왕의 즉위 불과 30년전인 지증왕 때이며, 그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 신라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풍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