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병제 (문단 편집) == 평가 == 세병제는 당장 써먹을 군대를 조달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큰 피해를 입은 후 군대를 재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상과는 달리 대규모 편성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전쟁이 발생하여 병력 수요가 증가하고 대규모 유민이나 반군이 대거 항복해올 때야말로 대규모 신규 편성에 적합하였다. 실제로 조조가 황건적의 포로 30만 명을 받아들여 편성된 것이 바로 조조의 [[청주병]]이고 이들이 세병제의 시초가 되었다. 반면 인구 과밀 현상이 일어나 병호에게 지급할 땅이 부족할 경우에는 병호를 늘리기 어렵고, 앞서 언급했듯이 병호의 지위가 급락하면서 오히려 병사의 질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따라서 전란이 장기간 지속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한 시대(ex. 삼국시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당 말기 [[오대십국시대]], 몽골 침략기, [[명청교체기]] 등)에 가장 적합하고, 반대로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인구가 급증한 시대에는 적절성이 떨어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대체할 목적으로 대우를 크게 개선한 부병제가 도입되었으나, [[당나라군]]에서 보듯이 세병제에서 본질적으로 바뀐 점이 별로 없었다. 점차 [[당나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급여되는 토지가 감소하면서도 각 병사의 부담이 과중하게 되어 당나라 중기에 가서 붕괴되었고, 절도사 체제가 자리잡았다. [[송나라]] 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모병제가 자리잡았으나, [[명나라]] 초기에 다시 세습되는 병호제로 전환했다. 또한 [[청나라]]의 [[팔기제]] 역시 세병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바뀐 것이 현대의 [[미얀마군]]. 이들은 농지 대신 군대가 운영하는 여러 사업체에 취직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민간경제와 격리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미얀마군 병사들과 그 가족들은 미얀마 시민들과 관점이 매우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