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계급적 분석: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 === 덧붙여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조선 중기 사림들의 집권 이후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예견된 흐름으로도 볼 수 있다. [[중종(조선)|중종]] 시기의 빈번한 대옥사와 불안정했던 정치로 인해 조정 출사를 거부하거나 관직에 있어도 사직해서 지방으로 낙향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래서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지방에서 학문적 소양을 닦거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시켜 제자를 양성했는데 그중에서 발달된 지역이 영남 지역이었고, 이러한 영남 사림을 기반으로 해서 [[선조(조선)|선조]] 시기에 집권하며 [[북인]]과 [[남인]]이라는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 시기에 이어진 대옥사와 북인의 분열,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영남 사림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서인]] 세력을 위시한 기호 사림[* 경기도와 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이 쇠퇴한 영남 사림을 대체했으며, 남인도 예외없이 인조반정 이후에는 기호 사림으로 채우게 되었다. 인조 시절부터 서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기호 사림들이 조정을 장악한 이후로 환국이 남인 아웃으로 일단락된 숙종 후기인 [[18세기]] 들어서면서 사림이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사족과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사족으로 나뉘어졌다. 수도권, 그나마도 명문 출신이 아니면 과거 급제는 물론,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화 사족의 비대 현상'''이 심화되었고, 17세기 중반 이후로 권력의 핵심에 멀어진 영남 사족들은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으로 그 권세를 잃었고 결국에 경상도는 이후 [[영남만인소]]로 정조가 공식적으로 차별을 폐지할 때까지 60년간 반역지로 몰리게 된다. 한양과 기호 출신의 중앙 관직 독주로 권력에서 멀어진 지방 사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서원을 통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필사적이 된다.[* 1800년대 순조 초 서북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의 가장 큰 원인 역시 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북 지방이 경화 사족에게 권력의 부스러기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서북 지방의 차별은 과거부터 있었으니 그렇다쳐도, 그 부스러기라도 얻어먹던 지방마저도 가관이었다. 광해군 시기만 해도 세력이 컸던 영남 사림의 경우에는 인조반정으로 경상우도의 북인도 붕괴되었으며, 남은 영남 남인들도 이인좌의 난으로 배제가 완료된다. 이미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가 회덕(지금의 대전)과 니성(지금의 논산)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은 서인의 (지방) 산림이란 1700년대 초반에 이미 충청도만 남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조]] 후반기, 즉 [[18세기|17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사색 당파 가운데 남은 붕당은 노론과 소론뿐이었으나 당파색을 갖추고 있었던 노론 강경파는 [[신임옥사]]로, 소론 강경파는 영조 31년에 벌어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몰락했으며, 노론과 소론 모두 서로 다르게 된 정치적 의리를 갖추지 못하고 왕의 영합에 맞추는 탕평파들이 집권한 상태로 된다. 한편 [[허목]]의 생존으로 살아남은 남인들이 청남의 [[채제공]] 중심으로 최후의 재기를 노리지만 채제공을 마지막으로 정승을 배출하지 못했고,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벽파에 의해 몰살당한다. 한양 명문가 출신이 아니면 관직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으며, 거기다 탕평파의 집권으로 [[풍산 홍씨]], [[경주 김씨]] 같은 가문이 주도하게 되면서 노론 일당 내에서 북당, 남당으로 계파를 만들고 당을 주도하는 흐름을 보였으니, 이미 영조 후반기부터 세도정치의 조짐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영조 이후 정조는 등극과 함께 척신 정치를 척결하고, 벽파를 한 축에 두며, 몰락한 남인•소론 등에게 힘을 실어주어 영조 전반기 이전의 붕당정치의 복원을 꾀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론 천하였다, 인조~경종 연간 당색별 당상관 배출 인원 비율은 서인 76%, 남인 13%, 북인 11%였지만 영조~정조기의 연간 당상관 배출 인원 비율은 노론 81%, 소론 14%, 북인 4%, 남인 1%로 노론의 권력 독점이 더 심해졌던 것. [[https://www.chosun.com/opinion/2021/07/14/CM4CGVZ75RAH5EKRIUCTXWOTXE/|#]]]하지만 정조 사후에 발생한 [[신유박해]]로 [[남인]], [[병인갱화]]로 [[벽파]]가 소멸되면서 붕당다운 붕당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현실주의 세력인 시파 가운데서 권세를 가진 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탕평파와 시파는 결국 근왕 세력이므로 의미있는 당파라고 볼 수도 없다. [[바로크]] 뒤에 [[로코코]]가 출몰했듯, 세도정치란 근본적으로 영조, 정조의 절대왕정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이 문제를 간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섭정 당시 중앙정계에 배제되어 있던 종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를 끌어들이고, [[서얼]]과 [[향리]]의 차별을 철폐하는 등 배제되어 있던 세력들을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고종의 친정 전까지 일시적으로나마 세도가의 전횡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