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정조 전후의 세도 정치 === [youtube(LBbr-hiIEiQ)] 정조가 1776년에 즉위하고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역적 아버지를 죽인 외척 세력에게 위협을 받던 정조의 심복으로, 사서에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조의 즉위 후 외척을 숙청하면서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 홍국영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의 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원빈 홍씨는 그 가례를 치를 때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고, 생전에 조정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사후 시호와 원호를 받는 등 여러 면에서 후궁의 격에 맞지 않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홍국영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정조의 지시에 의해 물러났으며 직후 탄핵 당해 강릉에 있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로 인해 세도정치란 말이 나타났으나 그 폐단은 비교적 짧았다 하겠다. 홍국영이 몰락한 이후에 벽파와 시파로 나뉘는데 흔히 [[벽파]]와 [[시파]]의 분류를 사도세자와 연관지으려는 말이 많다. 우선 벽파와 시파의 구분 자체가 [[정조(조선)|정조]] 때의 일이며 벽파는 척신 홍봉한에 맞서려는 청명당 즉 [[김종수]], [[심환지]], [[윤시동]] 등의 젊은 선비들로 구성된 무리가 시초였고 그 반대쪽이 홍봉한에 영합하여 권력을 얻으려던 탕평당의 무리였다. 벽파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존재한 적조차 없고 그들의 전신인 청명당이나 노론 또한 사도 세자의 죽음에는 별 책임이 없다. 본격적으로 벽파, 시파가 대두되었는데 이때 벽파는 의리를 내세워 역적의 무리인 남인, 소론과는 한 조정에서 있을 수 없으며 사도세자 추숭 또한 의리를 내세워 집행한 일로 추숭을 거행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조정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추숭을 한다는 말은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고 당시 조정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국본을 해친 역이라는 주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노론의 일망 타진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니 벽파는 추숭에 찬성할래야 찬성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찍혀 입지가 취약한 소론과 [[채제공]]을 위시로 한 남인이 시파의 입장에 서고 정조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에 규장각을 통해 성장한 소장파 들과 공신 [[정민시]] 등이 시파에 합류하는 등 시파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정조는 벽파에게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벽파를 같은 정국 파트너로 생각했으며[* 벽파는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추숭을 반대한 거지 정조와 대립한 건 아니었기 때문. 애시당초 왕과 대립한다는 것 자체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이 정조의 왕권 약화로 이어질 위험도 있긴 했다. 어쨌거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도록 명한 것이 영조이며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 자체가 선왕 영조에 반하는 것으로 비춰질 염려가 있어서 그렇다. 또, 그렇게 사도세자가 죽은 이상 굳이 사도세자를 들추지 않는 편이 정조에게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 즉, 벽파는 '우리는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내미인 정조를 반대한다'가 아니라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은 선왕의 뜻에 반하는 일이니 거두어 주시옵소서.'가 이들의 스탠스였다.] 이는 심환지에게 '우리 벽패는...'이라며 어찰을 보내 동지 의식을 드러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800년에 정조가 죽으면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김관주, 김용주, 김일주 등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가문으로 이루어진 벽파가 5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정순왕후와 벽파는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천주교([[가톨릭]])와 친했던 남인을 제거하거나 유배해서 몰락시켰다. 그리고 1805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벽파의 세력이 위축되며 시파의 세력이 키워지자 1806년에 정조와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명분([[병인갱화]])으로 벽파는 제거당하거나 유배로 쫓겨났다. 결과적으로 남인은 신유박해로, 벽파는 병인갱화로 몰락하자, 시파만 남게 되었고, 시파는 [[김조순]]을 중심으로 해서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실제로 정조는 개인의 역량을 기반으로 정치 세력의 개편을 꾀했으나[* 여기에서 정조가 사실상 "편지 정치"를 통해 당파 간의 갈등을 인위적으로 짜여진 각본 내에서 오고가게 하여 정조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구축점을 잃었다. 초창기 [[순조]]는 벽파 숙청 및 열심히 정사에 임하는 등 좋은 역량을 보였으나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그야말로 국정에 질려버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정치에서 손을 떼게 되어버렸다. 순조의 이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일련의 '개편'이 기존 정치 질서의 파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