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이전 왕조들과의 비교 === 고려 왕조의 경우는 [[무신정권]]이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문제는 조선 왕조처럼 400년이 지난 이후가 아니라 그것도 중엽부터 이걸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많이 죽인 숫자로 따지면 '''고려의 무신정권이 훨씬 더 많았다.''' 무엇보다 여몽전쟁에 대한 기록이 축소된 것도 최씨 무신 정권의 어용 문신들이 《실록》이나 《실록》이 아닌 《전쟁록》을 통한 일기를 남기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항간에 무신정권을 무신정권이라고 하지 않고 세도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박서]]와 [[김경손]]을 비롯한 무장과 [[김방경]] 같은 무장의 활약으로 무신정권이 아닌 세도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애초에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에선 권신들이 연이어 집권했다고 했지 무신으로 취급을 하질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는 조선과 달리 일찍이 세도정권과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고 이후 원 간섭기 이후 무신정권이 없어진 틈을 타서 [[권문세가]]들이 그 바통을 이어나갔다. '''한마디로 고려의 경우는 조선의 몇 배나 되는 기간인 200년이 넘는 세도정치를 한 셈이고 조선보다 2배의 기간을 그렇게 보냈다.''' 특히 고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음서와 추천이 허용되는 사회였고, 과거제의 경우도 [[지공거]] 체제였기에 추천의 형태가 꽤 많았다. 그래서 말이 좋아 무신정권이지 무신정권도 따지고 보면 권문세도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정치를 이룩했다. 즉 무신정권이나 권문세가 역시 세도정치로 규정을 하곤 한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 이후 [[권문세가]]들이 몰락하자 이젠 [[당여]]가 말썽이었고 조선 초까지 당여가 말썽이 되니 [[지공거]]를 혁파시켰다. 이는 신라, 고구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경우 [[혜공왕]]의 진골 왕족에 대한 홀대가 이전부터 일어나자 이후 혜공왕이 피살되고 전권이 왕족에게 돌아가는 기형적인 구조로 흘러갔으며, 백제의 경우는 [[해구•연신의 난]] 이후 대성 8족들에게, 고구려의 경우 [[간주리의 난]] 이후 5부 귀족들에게 실권이 돌아갔다는 점에서 보면 이미 조선뿐만 아니라 그전의 왕조들도 이와 유사한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발해의 경우도 800년대를 기점으로 왕들의 재위 기간이 급격히 짧아졌다는 점에서 발해의 호족과 귀족들에게 전권이 넘어갔다는 점에서 조선 말고도 이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중앙의 왕권이 약해지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 권신에 권력 대부분을 양도하고 왕실과 국체나마 보존하려는 기형적인 비상체제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힘은 신성불가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오스만 제국]] 몰락기의 타락한 [[예니체리]] 등]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처럼 조선도 결국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정권을 구축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의 경우, 이전 왕조들과 다르게 나가기 위해 사병과 사전을 폐지하고, 절간 노비들을 면천시키며 절간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왕족들의 권한을 낮추기 위해 [[종친과]]조차 폐지하며 그에 따라 온갖 법률을 짰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역효과로 작용해 나중에는 심각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경제력 및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고, 세도정치라는 기이한 형태로 나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전 왕조들에 있었던 온갖 구습들을 없애려다가 또 다른 구습들이 생긴 것이었다. 조선왕조 입장에선 이 노력이 가상하긴 했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전 왕조들의 실정을 없애려다가 조선이 자체적으로 실정을 만들어 멸망할 계기를 만들어낸 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