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순조]] 시대(1800년 ~ 1834년) === 19세기 순조 시대의 세도정치는 왕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왕의 처가인 '[[신 안동 김씨]]' 가문을 주축으로 왕인 순조의 '''친''' 외가인 '[[반남 박씨]]' 가문이 우대를 받는 형태로 전개됐다.[* '친'을 강조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왕의 외가라고 한다면 선왕의 왕비. 즉, 왕대비의 친정이자 [[외척]]을 의미하는데 순조의 법적 어머니이자 왕대비는 [[효의왕후]]이다. 즉, 국왕 순조의 (법적)외가 가문은 엄연히 [[청풍 김씨]]이다. 그런 청풍 김씨를 제치고 엄연히 후궁에 불과한 친어머니 [[수빈 박씨]]의 친정인 [[반남 박씨]]가 사실상의 외척으로 군림한 것이다.][* 물론 왕손을 낳은 명문가 후궁의 위세와 권력은 분명 동서고금 무시할수 없지만 똑같은 명문가 출신이면서 적모이자 왕대비의 친정가문도 누를수 있을 정도이면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세도정치를 확립한 김조순이 얼핏 보면 [[간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론 겸양의 처세와 지방 인재 추천 등으로 당시엔 '[[군자]]'로 불렸던 인물이다. 오히려 김조순이 유명한 간신들과 비슷한 오명이 있었더라면 세도정치의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김조순이 굳건하던 순조 시대에는 [[홍경래의 난]]을 제외하면 조선의 중앙 정치가 안정화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러나 오래 유지된 조선 정치 사회 체제의 부조리([[삼정의 문란]])는 계속 심화되어 갔고, 김조순이 [[효명세자]], [[순조]]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죽으면서 그의 자식들, 조카들 그리고 친족들이 김조순이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점차 막장 행보를 달리면서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 대에 세도정치가 가진 문제들이 심각하게 표출된다. [[시파]]였던 신 안동 김씨[* 모든 안동 김씨가 시파였던 건 아니었고, 김조순을 주축으로 한 세력들이 시파였다. 벽파에 서서 김달순처럼 아작난 안동 김씨들도 있었다.]는 [[천주교]]에 제법 온건하였다. 신 안동 김씨의 봉사손이 천주교 혐의로 [[신유박해]] 때 처형되기도 했을 정도. 또 [[고증학]]에 관심을 가지는 등 '성리학 유일 사회' 조선 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눈을 바깥으로 돌려 보면 권력의 최상층부를 장악한 집단의 내부에서 시야가 넓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지배층이기에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들이 천주교에 관대했을 뿐이며, 현실 개혁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때 [[효명세자]]의 장인이 된 [[조만영]]은 조득영의 아우로, 조득영은 벽파의 김달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순조 초 벽파, 시파 간 싸움에서 벽파를 아작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이 점이 마음이 든 순조는 특별히 그의 동생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데 이것이 [[풍양 조씨]]를 세도 가문의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실 풍양 조씨는 이전에 서인-소론-시파에 속하긴 했지만 당파의 전면에 나서는 인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 외척이 된 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 때 순조 34년, 헌종 15년, 철종 14년을 합쳐 63년간, 반올림해서 60년을 세도 정치 시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밀히 말해서 틀린 것이다. 순조가 즉위한 후 4년간은 세도정치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벽파]]가 집권하고 있었고,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죽은 뒤 2년간은 시파, 벽파 대립 시기였으며 그리고 한동안은 [[소론]] 대신 이시수, 이병모 등과 시파계 대신들이 [[조정]]을 주도해나가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순조는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선왕 정조와는 달리 국정 장악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민생에만 주로 관심을 보여서 성과가 미미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홍경래의 난이 터진 이후로 본격적으로 순조는 정사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서 대신들에게 일을 맡겼다. 순조의 건강이 악화된 것도 있었는데, 이때 순조의 건강 상태는 굉장히 나빴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도 비슷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각설하고 순조 시대는 어디서부터 세도정치로 설명해야할지 애매하긴 한데 김조순은 조금 전에 설명했듯이 막후 정치를 즐겨 신 안동 김씨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삼갔고 그가 죽은 후인 순조 32년이 되어서야 신 안동 김씨가 전권을 장악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세도정치를 이루게 된다. 게다가 헌종 시기에는 헌종이 20세가 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함에 따라 신 안동 김씨가 박살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따지자면 순조의 마지막 2년, 헌종 즉위부터 13년까지, 철종 14년 정도가 진짜로 세도 가문이 조선을 지배한 시대였다'''.[* 다르게 얘기하면 생각보다 짧다면 짧은 잠깐동안의 시기에 나라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한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832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역사가 있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서양 상선인데, 일본에서 미국의 페리가 함포 외교로 강제로 개항한 사례와 달리,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던 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 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 말기에 당해온 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 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832년은 순조의 마지막 2년으로, 바로 앞 문단에서 읽었겠지만 '''하필이면 참 절묘하게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시작 시기와 겹친다.''' 특히 성리학 교조주의의 고착화와 세도정치의 성행으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조차 조선은 매몰차게 거부한다. 참고로 암허스트 호의 방한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원인이 된 쿠로후네 사건(1853년)보다 무려 21년이나 빠른 접촉이었다. 구석에 있던 류큐국(오키나와)이나 한참 전쟁을 했던 일본과도 통상 및 외교 관계를 맺을 정도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외교를 했던 조선이 메리트가 있음에도 매몰차게 거부한 것만 봐도 세도정치가 조선에 얼마나 심각한 병폐를 가져왔는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는 세도정치기의 정치가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조선 건국 [[적폐|초기부터 시작되어 수백년간에 걸친 병폐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터져나온]]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세도 정치기 정치인들의 잘못도 컸지만. 사실 일본도 쿠로후네 사건 이전까지는 서양과의 교류를 금지했고,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한해서는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용한 것 정도. 하지만 이마저도 이미 [[센코쿠 시대]]부터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양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저런 시선은 역사를 만약이자 결과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애초에 저건 암허스트 호가 특수한 거였고, 이후 조선에 온 이양선들은 평화롭게 나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약탈을 하는 등의 짓거리를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먼저 서구권과 접촉하고 교류하던 일본과 중국 등도 결국 이후 서구 열강들의 강압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베트남, 인도, 중동 등은 아예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