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탈식민지화 === [[탈식민지화]]는 말 그대로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들이 독립하는 현상으로, 세계사에서는 대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줄지어 독립한 현상을 일컫는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일어났었으나 그러한 흐름이 세계적 인정을 받고 본격적인 탄력을 얻은 것은 2차대전 이후였다. 1960년 [[유엔]]이 유엔 결의 제1514호를 통해 식민지 국가와 인민의 자결권을 인정함에 따라 식민지배는 국제법에 위반되는 것이 되었다. 21세기 현재 식민 착취 형태의 [[식민제국]]은 모두 해체되었으며 일부 [[속령]]이 그 잔재로 남아있다. ||[[파일:모한다스간디.jpg|height=150]]|| || [[마하트마 간디]] [br] {{{-2 (1869~1948)}}} || 1857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에서는 약 90년간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인도 독립운동에서 단연 핵심적인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며 [[비폭력주의]]와 [[시민 불복종 운동]]를 강조하였고,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하는 소금 행진(1930) 등을 벌이는 등 다양한 사회 참여 독려로 세계적인 지지와 존경을 얻었다. 또한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국민회의 계통의 독립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 운동 또한 목소리를 얻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이 지속되며 인도인들의 자치권이 확립되어 인도인들에게 [[민주주의]] 의식이 정착되었고, 이에 [[1947년]] [[8월 15일]] 영국은 인도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독립을 승인했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며 일본의 점령 및 지배 하에 있던 식민지들도 독립을 선언했다. [[베트남]]은 [[호찌민]]의 지도 아래 독립을 선언했으나 기존 식민 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침공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5~1954)을 일으켰고, 이 결과로 베트남은 독립하였으나 호찌민의 공산당 지배 하인 [[북베트남]]과 서방 세계의 지지를 받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인도네시아]] 또한 독립을 선언했으나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은 기존 식민 지배국 [[네덜란드]]에 의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이 발발하였으며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의 지도 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거머쥐었다. ||[[파일:African_nations_order_of_independence_1950-1993.gif|width=100%]] || ||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1950~2011) || 또한 [[아프리카]]에서도 탈식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이후로 [[에티오피아 제국]]과 [[라이베리아]]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배에 놓여있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헤레로족]] 봉기 등 반제국주의 운동이 꾸준히 일어났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범아프리카주의와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생겨나며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영국령 골드코스트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가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는 학문적 개념으로서의 탈식민주의를 정립한 핵심적인 인물로 손꼽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현 문제는 서구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악영향 때문이며 해결책은 해결책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범아프리카주의라고 주장했다. 종전 이후 [[알제리]]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받아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이 거세졌다. 그중 1960년에는 아프리카 17개국이 한꺼번에 독립하여 [[유엔]]에 가입함에 따라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기도 했다. 독립으로의 여정 중에는 [[가나]], [[모로코]], [[튀니지]]의 경우와 같이 공식적인 외교적 방법으로 독립한 경우도 있었으나, [[케냐]]나 [[알제리]] 등 유럽 식민제국의 유혈 진압 또한 있었다. [[케냐]]의 경우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봉기(1952~1960)가 이뤄졌는데, [[영국]]은 독립 운동 관련자들의 처형은 물론 독립 운동 주축을 이룬 키쿠유족을 대규모로 고문, 학살, 강제이주시켰다. [[알제리]]의 경우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알제리 전쟁]](1954~1962)이 일어났는데, [[프랑스]]는 이를 상대하며 포로과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포르투갈]]의 경우 식민지들의 독립을 거부하여 포르투갈 정부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의 독립 무장단체들 간에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1961~1974)이 일어났으며 이는 [[카네이션 혁명]](1974)으로 포르투갈이 민주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파일:Frantz_Fanon.jpg|height=150]]|| || [[프란츠 파농]] [br] {{{-2 (1925~1961)}}} || >[[태평양 전쟁]]에서 부상당한 한 절름발이 고참 병사가 내 동료들에게 이렇게 고한다. "내가 내 의족에 익숙해진 것처럼 그대들도 그대들의 피부색에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익숙해져 보라구. 우린 어차피 모두 피해자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이 절단된 불구성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수용하라고 닥달한다. 어제, 세상의 아침을 향해 깨쳐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내게로 무너져 왔다. 날개가 마비된 채. 책임감도 없이 한 발로는 무(無), 다른 한 발로는 무한을 떡 버티고 선 채, 나는 긴 울음을 울었다. >----- > ''[[프란츠 파농]]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中 (1952)'' 식민지의 지식인들은 정치적 독립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으로도 유럽에서 벗어나는 [[탈식민주의]]를 추구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 출신 정신과 의사이자 정치철학자 [[프란츠 파농]]은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지식인인데, 그는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에서 [[정신분석학]]을 이용해 식민주의가 확립한 인종주의의 구조를 지적하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탈식민은 정신적, 문화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 사회학 사조로서의 탈식민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 뿐 아니라 [[아메리카]]·[[오세아니아]] 원주민·소수민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파일:merlin_161753625_a35b8f9a-0710-430d-8cf7-ee5eb0292038-superJumbo.jpg|width=100%]] || || [[인도]]-[[파키스탄]] 국경의 국기하강식 [br] {{{-2 [[영국]]에서 독립한 후 두 나라 사이에서는 [[카슈미르]] 등을 두고 계속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오랜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로 인한 인프라의 부족과 [[분할통치]]로 인해 거세진 종교, 민족간 갈등은 매우 극심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 힌두 민족주의와 이슬람 민족주의 간의 갈등이 식민지배 시대부터 형성되어 독립 이후 종교 [[내전]]이 발발하여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고,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수천만 명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강제이주 이후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밖의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서로 분리 독립하게 되어 이후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 공화국]]이 되었다. 이 국가들은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특히나 [[카슈미르]]를 둔 영토분쟁 또한 이러한 갈등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뭄바이 연쇄 테러]](2008) 등의 무력 충돌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경우 탈식민 이후에도 수많은 갈등이 이어지며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식민 착취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프라는 매우 부족하였고 고등 교육을 받은 식민지인들은 턱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독립 이후 수많은 독재 정권들이 출현했으며, 이는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 간에 제3세계의 주도권 싸움에 이용되었다. 또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다양한 역사적, 민족적, 언어적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어진 직선 국경선과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분할통치]] 등에서 보이듯 독립된 [[국민국가]]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식민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상태로 유지되었기에 독립 후 혼란이 가중되었다. ||[[파일:1920px-DRC_raped_women.jpg|width=100%]] || || [[2차 콩고 전쟁]](1998~2003)의 성폭행 피해 여성들의 권익 단체 모임 [br] {{{-2 [[2차 콩고 전쟁]]은 [[르완다 학살]]이 주된 계기였다. 탈식민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갈등은 큰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다.}}} || [[르완다]]의 경우 신분 상의 차이에 가까웠던 투치족과 후투족의 구분을 [[벨기에]]가 식민통치 중 [[분할통치]]로 투치족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형태로 이용하였는데, 이렇게 누적된 민족 갈등이 후투족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암살로 폭발하여 후투족 군경과 민병대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을 대규모 학살한 [[르완다 학살]](1994)이 일어났으며 [[자이르]]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민주콩고 대통령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암살되고(1961) 들어선 [[모부투 세세 세코]] 정부가 난민 문제와 경제 악화로 민심을 잃자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쿠데타가 일어나 발발한 내전에 [[르완다]]와 [[우간다]] 등이 참전하여 [[콩고 전쟁#s-2|제1차 콩고 전쟁]](1996~1998)이 발발했고, 휴전 이후 반정부 세력에 의해 [[콩고 전쟁#s-3|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이 발발해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참전, 이른바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으며 큰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다. 이후 [[르완다 내전]]과 [[콩고 전쟁]]의 군사 작전에 관여한 [[르완다]]의 [[폴 카가메]]는 종전 이후 [[르완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전후 수습, 경제 발전, 안전한 치안 확립 등에 있어서 성과를 이뤘으나 지금까지 이어지는 철권 독재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식민주의와 그로 인해 뒤따른 폐해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해결책을 도모했다. 주목할 만한 예시로는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의 자유민주주의 개혁, [[부르키나파소]]의 5대 대통령 [[토마 상카라]]의 사회주의 개혁,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의 권위주의적 경제 발전 등이 있다.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이러한 혼란상과 더불어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세계화]] 이후 경제적으로 기존 서방 식민 세력이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자본주의 강국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제적 식민지배나 다를 바가 없는 국가적 무기력감을 한탄하기도 하며, 이는 '신식민주의'라고 불린다. [[콰메 은크루마]]는 의해 아프리카에서의 영국과 미국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신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