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냉전과 탈냉전 === || [[파일:1920px-NATO_vs._Warsaw_(1949-1990).png|width=100%]] || || 파랑: [[북대서양 조약 기구]] [br] 빨강: [[바르샤바 조약기구]] || ‘[[냉전]](冷戰)’은 물리적인 전쟁인 '열전(熱戰)’에 반대되는 말로, 적성국 관계인 두 나라가 실제로는 ‘뜨거운’ 일대일 전면전을 하지 않지만 군비경쟁, 대리전, 첩보전, 선전전, 심리전, 문화전 등의 방법으로 ‘차갑게’ 대치하는 상황을 말한다. 세계사에서 '냉전'이라고 한다면 주로 2차대전 종전 이후 20세기 중후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이 두 강대국의 대치는 세계를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로 분할시켰고, 이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에 가까웠던 위기들이 찾아와 전세계인이 몇번이고 마른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종전 후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 확장과 팽창,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가 이뤄졌으며 이를 [[윈스턴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공산권]]에 대항하는 경제적 조치인 [[트루먼 독트린]](1947)을 발표했고 이후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군사·재정적 지원인 [[마셜 플랜]](1947)이 시행되었다. 또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창설되었으며(1947) 이후 나토에 서독이 가입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1955)가 탄생했다.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대량 제조하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고, 이는 [[뉴클리어 아포칼립스|핵전쟁으로 인한 세계 멸망]]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의 개념을 확립했다. [[스탈린]] 사후(1947) 서기장으로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으나 미국과의 체제 경쟁은 계속되었고,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헝가리 혁명]](1957)을 유혈 진압 하는 등 여전히 동구권에 대한 통제를 공고히 하였다. || [[파일:6.25 2.jpg|width=100%]] || ||||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작전]](1950) || [[그리스 왕국]]에서는 정부와 공산당 사이에서 발발한 2차 [[그리스 내전]](1946~1949),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가 장악한 서[[베를린]]을 [[소련]]이 봉쇄하여 [[미국]]이 시민들에게 비행기로 식량을 조달한 사건인 [[베를린 봉쇄]](1948~1949) 등 물리적인 냉전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의 불화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1946~1950)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긴 [[국부천대]]가 일어났다(1949).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1950~1953)에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중국군]]이 참전하여 국제적 대리전으로 이어졌으며, 휴전 후 현재까지 남북한은 분단되어 있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전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침략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가 일어났으며 종전 협정 후 프랑스군 철수 및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의 분단(1955)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첩보|첩보전]] 또한 진행되었는데, 미국의 [[CIA]], 소련의 [[KGB]], 영국의 [[MI6]], 동독의 [[슈타지]] 등의 정보기관들은 [[스파이]]를 이용하여 적국의 정보를 수집했다. [[프로파간다]] 또한 경쟁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영화]], [[방송]], [[연극]], [[포스터]] 등을 통한 선전물로 서로의 체제의 불안정성과 인권 탄압을 비판했다. 이러한 사회상으로 1950년대 미국에서는 광적인 반공주의 운동인 [[매카시즘]]이 일어나기도 했다. || [[파일:89449B89-4C95-41B0-B29F-98137647B65C.png|width=100%]] || |||| 반둥 회의(1955) [br] {{{-2 왼쪽부터 [[자와할랄 네루]], [[콰메 은크루마]], [[가말 압델 나세르]], [[수카르노]],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한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며 이러한 새로운 독립국들을 중심으로 반둥 회의(1955)가 개최되었고, 이후 냉전에서의 중립을 내새우는 [[제3세계]]가 탄생했다. 이는 기존 서방 식민제국들에 반하는 [[탈식민주의]] 운동과도 밀접하다. 이들은 미국의 [[제1세계]] 진영과 소련의 [[제2세계]]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비동맹운동]]을 주창했다. 비동맹 운동의 주요 인물로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등이 있으며, 이들은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미국이나 소련이 주관하는 군사 훈련 불참 및 비동맹 국가들 간의 협력을 선언했다. 이러한 제3세계와 식민제국 간 분쟁으로 [[수에즈 위기]](1956~1957)가 발발하기도 했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영국이 통제하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이에 군사적 부담을 느낀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하였으며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에게 국유화되었다. 한편 세계 각지의 국가들을 각자의 이념 체제로 편입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다툼이 거세졌는데, [[미국]]의 [[CIA]]는 제3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다양한 우익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이란]]의 [[팔라비 왕조]] 수립(1952), [[과테말라]] 쿠데타(1953), [[콩고 내전#s-2|콩고 분쟁]](1960~1965),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집권한 [[칠레]] 쿠데타(1973), [[엘살바도르]] 쿠데타(1979), [[이란-콘트라 사건]](1987) 등이 일어나 인권 탄압이 거세졌다. 미국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1959)으로 이뤄진 [[쿠바]]의 공산 정권 또한 [[피그만 침공]](1961)으로 전복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쿠바의 요청으로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며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1962)의 아찔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호르헤 비델라]]가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의 군정들과 연합하여 미국 [[CIA]]의 묵인 하에 좌익 및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콘도르 작전을 벌였고, 이에 [[더러운 전쟁]](1976~1983)을 일으켜 게릴라 단체들을 색출 및 진압하며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성고문을 자행했다. || [youtube(sjzZh6-h9fM,height=150)] || || [[우드스탁 페스티벌]](1969) 중 [[지미 헨드릭스]]의 [[미국 국가]] 연주 [br] {{{-2 굉음을 섞은 해당 연주는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과 60년대 반문화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 냉전 중반기부터는 자본·공산 진영 내의 다각화가 이뤄졌다. [[소련]]과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의 차이로 인한 사상적 갈등, 그리고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인해 [[중소결렬]](1959)이 일어났다. 자본 진영에서는 [[서독]]과 [[일본]]의 경제력이 커지며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이 기존의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을 압박하는 행보를 보인 [[수에즈 위기]] 이후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 통합군을 탈퇴하고(1966) 독자적 핵무장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해 [[베트남 전쟁]](1955~1975)에 참전해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상대로 싸웠으나 참전의 정당성에 국내외적 비판이 생겼고, [[68운동]]을 위시한 세계적 반체제 운동에 힘입어 반전 여론이 일었다. 미군의 전범 행위에 악화된 여론, 전국적 반체제 운동,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1972)으로 혼란해진 정세에 미국은 결국 1973년 철군하였고 2년 후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영토 내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학살이 일어났고 이에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이 친미 군부를 전복하여 집권하였으며 또한 집권 기간 동안 [[킬링필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1968)이 일어났는데,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시위를 유혈 진압하였고 이에 같은 공산권 국가들 포함한 세계적 비판을 받았다. || [[파일:C9DF4F21-48A6-4572-B2F8-EAAA0B5CD560.jpg|width=100%]] || ||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 [br] {{{-2 [[버즈 올드린]]이 [[성조기]]에 경례하고 있다. 깃발 왼쪽으로 보이는 것은 착륙선인 '이글(Eagle)'이다.}}} ||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 경쟁을 시작으로 [[우주]] 진출과 개발을 두고 대결하여 [[우주 경쟁]]이 이뤄졌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1957), [[라이카(개)|라이카]] 등 여러 동물들의 우주 진입 성공, 그리고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 진출 성공(1961)을 달성했다. 이에 미국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진행하여 수번의 시행착오 끝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고, [[닐 암스트롱]]이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을 내딛으며 인류는 처음으로 [[달]]에 진출했다(1969). 이후로도 1972년까지 총 12명의 미국인 우주비행사들이 달을 방문했다. 1970년대의 미국과 소련 양측은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국제적 다극화로 인한 대립에 부담에 의해 미소간 경쟁이 완화되는 [[데탕트]]가 이뤄졌다.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의 완화를 목표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했다(1차: 1972, 2차: 1979). 데탕트는 1979년부터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는데, 소련은 아프간의 친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파병했고, 이에 맞서 미국의 [[CIA]]는 쿠데타 세력인 [[무자헤딘]]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이란]]에서 [[이란 혁명]](1979)이 일어나며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자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며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또한 대리전으로 불거졌다. ||[[파일:마오쩌둥.jpg|height=150]]||[[파일:Deng-Xiaoping-1978.jpg|height=150]] || || [[마오쩌둥]] [br] {{{-2 (1893~1976)}}} || [[덩샤오핑]] [br] {{{-2 (1904~1997)}}} ||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 자리잡은 [[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주석으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사상인 [[마오주의]] 아래 은행과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 개혁, [[간체자]] 배포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농공업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 운동]](1958~1962)과 구습 타파 운동인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켰으나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의 속출과 인권 탄압이 이뤄졌다. [[마오쩌둥]] 사후(1976)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펼쳐 중국에 시장 경제를 적용하며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데탕트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닉슨-마오쩌둥 회담]](1972) 이후 관계가 완화되었는데, 미중 수교(1977)로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경제적 개혁으로 제1세계와 교류하며 중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중국인들의 삶의 질 또한 매우 향상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내의 부패와 탄압 및 제한된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며 정치적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으며 이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하여 [[천안문 6.4 항쟁]](1989)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경우 [[캄보디아]]를 두고 [[중국]]과 국경 분쟁이 생겨 [[중국-베트남 전쟁]](1978)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나친 군비 지출로 인해 경제사회적 혼란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개방 정책인 [[도이머이]]를 추진하였다. || [[파일:attachment/베를린 장벽/join.jpg|width=100%]] || ||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 [br] {{{-2 서독 경찰관이 무너진 [[베를린 장벽]] 너머로 건너오는 동독 군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 1985년 소련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정부패, 경제 침체, 국민 분열,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패전과 [[체르노빌 사고]](1986) 등으로 인한 사회 혼란의 해소법을 모색했다. 이에 언론 검열 철폐 등 사회적 개방인 [[글라스노스트]]와 정치·경제적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했다. 이로 인해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정치·경제적 간섭이 줄어들며 사회적 급변과 혼란이 일어나자 동구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었고,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동유럽 혁명]](1989. 6-12.)이 일어났다. 그중 1961년 [[동독]]의 인력 유출 방지를 위해 세워졌던 [[베를린 장벽]]을 시민들이 무너뜨린 사건(1989. 11.)은 냉전 종료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으며 1년 후 [[독일 재통일]](1990)이 이뤄졌다. [[루마니아]]의 경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무력 진압을 시도하며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유혈 사태가 일어났으나 시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1989. 12.). 고르바초프는 [[몰타 회담]](1989. 12.)에서 미국의 [[조지 H. W. 부시|부시]]와 냉전 종료를 선언했다. 그렇게 [[유럽]]에서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정권들은 몰락하였고, 그 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도 정치경제적 개방을 시행하거나 독자적 노선을 걸어 [[소련]] 체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소련 내부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지속되어 소련 내의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했고, 이러한 소련의 개방과 약화에 반발하는 공산당 보수파에 의해 [[8월 쿠데타]](1991. 8.)가 일어났으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자 독립파인 [[보리스 옐친]]의 주도로 진압되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사임을 발표하며 소련 구성국의 독립 인정 및 [[독립국가연합]](CIS) 출범을 발표하였고 이에 [[소련 해체|소련은 해체되었다]](1991. 12.). 냉전의 한 축이 사라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체제는 막을 내렸으며 이로써 냉전은 완벽하게 종료되었다. |||||| [[파일:usa-cia-brennan.webp|width=100%]] || || [[버락 오바마]] [br] {{{-2 (1961~)}}} || [[블라디미르 푸틴]] [br] {{{-2 (1952~)}}} || [[시진핑]] [br] {{{-2 (1953~)}}} || [[옐친]]의 경제 개혁 실패,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 민주주의 후퇴, [[체첸 사태#s-3.1|1차 체첸 전쟁]](1994~1996)의 패배 등으로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큰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옐친을 이어 2000년에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여 현재까지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크림 위기]](2014)와 [[돈바스 전쟁]](2014~진행중)으로 친서방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거나 인권 탄압을 행해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으로 인해 폭발하여 군사적 대립으로 다시금 이어졌으며, 미국과 서방 세계는 경제 제제로 보복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 미국은 강력한 국력으로 국제 정세와 문화를 재정립했고, 세계질서는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걸프 전쟁]](1990~1991)에 참전하여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키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2001)과 그에 이어 [[이라크]]를 [[이라크 전쟁|침공]](2003)하여 국제적 비판에 직면했고, [[이라크]]에서는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미군의 전범 행위가 밝혀지거나 아프간 철군 이후 [[카불]]이 [[탈레반]]에게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순식간에 함락되는]] 등(2021) 위신이 실추되었다. 또한 [[대침체]] 등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위기가 찾아왔고, [[중국]]과의 [[미중 패권 경쟁|패권 경쟁]]으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약화되었다. [[덩샤오핑]]의 개혁 이후 자본주의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경우 21세기에 들어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의 통치 아래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시진핑]]은 기존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에서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시키는 1인 독재 체제로 변혁을 꾀하며 기존 제3세계 국가들에 강력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새로워진 국제 정세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