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youtube(yOS78ul1_rA, width=300, height=150)] || ||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대서사시〉 [br] 13세기경부터 구전됨 [br] {{{-2 그리오(griot)들은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이다. 이 서사시는 [[말리 제국]]을 건국한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의 일대기와 활약상을 다룬다.}}} || [[서아프리카]] 일대에서는 [[가나 제국]](와가두)이 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 왕국들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패권을 쥐고 있었다. 현재의 [[말리]]와 [[모리타니]] 국경 사이에 위치했던 가나 제국은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대]] 남쪽을 왕복하며 횡단하며 황금과 소금을 주로 거래하여 [[사하라]] 종단 대상(隊商)들, 그리고 영토 내의 수많은 금광들 덕분에 아주 부유해 질 수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기록한 문자 기록은 적기 때문에 [[가나 제국]]이 정확히 언제 발흥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경에 국체가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나 제국의 존재는 서아프리카의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인 그리오들, 그리고 서기 8세기 아랍인들이 글로 기록함으로서 그 실체가 확인된다. 9세기경 저술가 알야쿠비는 "가나는 매우 강력한 왕이 있으며 주변의 왕국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함한 [[서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황금들이 나온다", "주변의 왕국들은 카우카우, 카넴, 말렐 등이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가나 제국]]이 아우다고스트에 있는 남부 산하자의 무역 거점을 정복(1054)하면서 산하자족의 반발이 생겼고, 이는 가나의 연방제 내부의 마찰과 분열 및 [[무라비트 왕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가나 제국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붕괴로 인하여 11세기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 내전과 가뭄으로 인해 몰락하였고, 이에 작은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서아프리카 일대를 만딩고족의 지도자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가 통합하였다. 이때 서아프리카 일대는 주술사 왕 소우마우로 칸테가 통치하는 소쏘족의 나라 소쏘 제국이 패권을 쥐고 있었다.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대서사시〉에 따르면 소우마우로는 잔인한 폭군이었다고 하는데, 이에 케이타의 군대는 소우마우로의 폭정에 맞서 싸웠고, 키리나 전투(1235?)에서 소쏘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며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는 말리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황제의 칭호인 '[[만사]]'를 칭했다. ||[[파일:p074jvk5.jpg|width=100%]] || || [[만사 무사]] [br] {{{-2 (1280? ~ 1337)}}} || [[말리 제국]]은 [[가나 제국]]이 그랬듯 압도적인 금 생산량으로 곧 서아프리카 경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제9대 군주인 [[만사 무사]]는 본인이 독실한 무슬림인 것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 선진적인 [[이슬람]] 세계에 밀착하기 위해 전국적인 이슬람 교육을 장려해 [[팀북투]] 등을 비롯한 도시들이 서아프리카의 학문적 허브가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발달과 더불어 계속되는 사하라 종단 무역 덕분에 말리 제국은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는데, 때문에 "금은 북쪽에서, 소금은 남쪽에서, 지식은 팀북투에서 난다"는 당시 말리 제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는 서아프리카 속담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또한 기병대를 운영하여 세력권을 확대시켜 말리 제국은 니제르 강 근방에 위치해 무역하기 좋은 도시들인 가오와 젠네 등을 영토 내에 넣었다. 만사 무사는 또한 말리 제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메카]]로 호화로운 성지순례를 벌였는데(1324), 그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금화를 뿌렸고, 순례 중 [[카이로]]에서 멈춰 [[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이때 황금을 시장에 너무 많이 풀어버리는 바람에 카이로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지역 경제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만사 무사 본인은 현지의 대금업자들에게 일부로 고리로 돈과 황금을 빌려서 이러한 사태를 무마하려고 하긴 했지만, 카이로의 황금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는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파일:217AD0DF-DE13-4199-A56C-6BCB86310AB4.jpg|width=100%]] || || 젠네 모스크 [br] 12~13세기경 건축 || >"나는 흑인들의 왕도인 말리에 도착하였다. 말리의 왕은 만사 술레이만이었다. 만사는 [[술탄]]이라는 뜻이고, 술레이만은 그의 본래 이름이다. [...] 흑인들의 선행으로는 부정이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부정을 가장 적게 저지르는 사람들로서 술탄은 그 누구도 추호의 부정이라도 저지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들의 선행으로는 전역에 안전이 보편화되어 있다. 여행자건 상주자건 도둑이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예배를 끈질기게 하는 것도 그들의 선행 중 하나이다. 그들은 꼭 집단예배를 근행하며 자식들을 그렇게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끝으로 그들의 선행으로는 거룩한 [[쿠란]] 암송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자식들이 [[쿠란]]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쇠고랑을 채웠다가 암송해야 풀어준다. 어느날 나는 한 젊은이 곁을 지나갔다. 준수한 용모에 멋진 옷을 입은 젊은이인데,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동행자에게 '저 사람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내 [[아랍어|말]]을 알아듣고 픽 웃었다. 그 옆의 사람이 나에게 '쿠란을 암송하라고 족쇄를 채운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 >''[[이븐 바투타]] - 《여행기(리흘라)》[* [[정수일]]의 한국어 완역본에서 발췌. 다만 일반 독자들에게 조금 더 친숙한 표기법으로 수정했으며(예: 쑬퇀 -> 술탄), 일부 생략 및 접속사 추가 등의 수정이 있음.] 中 (1355)'' 이러한 일화로 인해 [[황금]], [[소금]], [[옷감]], [[노예]]들을 거래하려는 상인들과 이슬람 학자들 등의 방문객들이 말리 제국을 찾았다. [[이븐 바투타]]도 그중 한 명으로, 그의 여행기는 말리 사람들의 생활상과 말리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의 기록은 말리 제국의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주권이 있었다는 것이나, 지도 계층과 상인들의 이슬람교와 일반 민중들의 토속 신앙의 공존을 추구하는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5세기부터 말리 제국이 투아레그와 투클로르, 월로프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차츰 쇠퇴해 갈 무렵 1464년에 손니 알리가 건국한 [[송가이 제국]]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해 큰 영토를 차지했으며, 말리를 밀어내고 [[팀북투]], 젠네, 가오 등을 비롯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도시를 탈환하며 지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아스키아 왕조의 치세 동안 송가이는 전성기를 누려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아스키아 왕조 초대 황제인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중동의 이슬람 세계와 외교 관계를 곤고히 하여 국제 세계에서 무슬림 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16세기 말 송가이 제국은 내부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워졌으며, 이후 [[모로코]] [[사드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1591). 핵심적인 영토를 빼앗긴 채 변방으로 밀렸지만 근근히 약소국으로라도 살아있던 [[말리 제국]]은 모로코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여 막아내는데 어떻게든 성공하지만, 결국 또 다시 일어난 내전과 대서양 노예 무역으로 인한 인력의 급격한 손실 등으로 인해 쇠락하여 멸망하고 만다(1670). ||[[파일:WLA_metmuseum_Head_of_an_Oba_16th_century.jpg|width=100%]] || || 베냉 제국 여왕의 청동상 [br] 15~16세기 제작 추정 || [[서아프리카]] [[사헬 지대]]의 남쪽으로는 [[요루바]]족, 이보족, 에도족, [[아칸족]] 등이 지금의 [[나이지리아]], [[토고]], [[가나]]에 해당하는 지역 근방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아왔다. 위에서 언급한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 무역 등 교류를 하며 경제적 생활을 한 이들의 문명에서 또한 수많은 수의 왕국, 제국들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1160년에 요루바인들이 건국한 오요 제국, 1180년에 에도인들이 건국한 베닌 제국 등이 주변 도시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11세기에 건국된 [[아칸족]]의 국가 보노만은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 지역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쥐었으며, 이후 다양한 아칸족 계열 국가들인 만케심, 덴키랴, 아콈, 아콰무 등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예술 문화에 있어 큰 발전을 겪었는데, 특히 베닌 제국은 조각술과 주조술이 발달해 아주 정교한 형태의 청동상 작품을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베닌 제국의 궁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닌 청동상(Benin Bronze)은 그 정교함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다수의 베닌 청동사는 유럽의 식민화 당시 약탈되어 현재 대다수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계속 반환을 요청 중이다.] 또한 아칸족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감인 '켄테(Kente)'를 제작하여 입었으며, 이는 아프리카 외의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범아프리카주의적 상징으로 사용되는 등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사하라 사막 전반으로 카넴-보르누 제국 또한 해당 지역에서 정치경제적으로 핵심적인 강대국으로 자리했다. 기원후 700년경에 카넴부 족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 카넴 제국은 오늘날의 리비아 남부와 니제르 동부, 나이지리아 북동부, 카메룬 북부, 차드의 차드 호 유역까지의 영토를 지녔다. 700년경부터 1086년까지 두구와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085년부터 1846년까지는 세파와 왕조가 통치하였다. 사오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군사력이 쇠락하자 우마르 이드리스에 의해 1387년경 보르누 제국으로 국체를 계승하였다. 중앙아프리카의 [[차드 호]]를 중심으로 경제사회적 허브를 형성했던 카넴-보르누 제국은 막강한 [[기병대]]를 운영하는 등 군사적 힘을 떨쳤으며, [[투아레그족]], [[풀라니족]] 등 유목민 민족들과의 교류를 통한 경제적 영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ab431a648a2785dc939ca3cdd7503a3.jpg|width=100%]] || || [[랄리벨라 암굴교회]] [br] 13세기 설립 || [[동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기원전에 이미 [[악숨 왕국]]이 건설되어 로마, 이집트, 인도 등과 활발히 무역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정립되었다. 에티오피아 문명에서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으며 악숨의 셰바 여왕과 이스라엘의 솔로몬 대왕의 이야기는 에티오피아사(史) 전반에서 정통성을 따지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악숨 왕국은 예멘 지역에도 진출하여 홍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여 악숨 왕국과 마찰이 지속되었고 악숨 왕국은 해상 무역의 장악력을 잃게 되며 쇠퇴하게 된다. 10세기에 악숨 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후 한동안 이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지속되었는데, 자그위 왕조가 이를 종식하며 에티오피아의 새 주인으로 떠올랐다(1137). 자그위 왕조의 혈통은 솔로몬 대왕 및 셰바 여왕을 전승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여 학자들은 이 왕조의 왕이 총 몇 명이었냐를 두고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즈음 [[아프리카의 뿔]]의 이슬람화로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서는 고립되었다. 그러나 [[카이로]]의 기독교인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인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 [[랄리벨라 암굴교회]]의 설립, 그리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진 여러 십자군 국가들과 교류한 정황 등 유럽과 서아시아의 기독교 문화권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에티오피아계 용병들이 십자군 측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에티오피아계 기독교도들의 귀환을 장려했으며 에티오피아 출신 성지순례자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14세기 초 자그위 왕조의 웨뎀 아라드 황제가 서른 명의 대사를 유럽에 파견하여 교황과 대립교황을 만나고,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며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 국가들과의 연대를 쌓고자 했다. 1270년 즈음, 솔로몬 대왕과 셰바 여왕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예쿠노 암라크의 봉기로 자그위 왕조가 무너지고 솔로몬 왕조가 들어섰다. 솔로몬 왕조는 대대적인 군사적 개편과 영토 확장으로 [[아프리카의 뿔]] 전역을 차지한다.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에 나오는 전설의 왕국으로 알려지며 교류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이 나라를 찾기 위해 [[바르톨로뮤 디아스|바르툴루메우 디아스]]를 시켜 아예 [[아프리카]]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게 했다. 운 나쁘게도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것을 모르고 중도 포기했지만 대신에 [[희망봉]]을 발견하였다.][* 분명 바로 위의 문단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직접 교류까지 했는데 어떻게 전설 속 왕국으로 여겨질 수 있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당시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지역이 반란으로 에티오피아로부터 떨어져나가 홍해로 통하는 교역로가 끊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이 흐르며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혔기 때문이다.] 이후 [[아달 술탄국]][* 당시는 [[하라르]]를 수도로 하여 특히 '하라르 술탄국'이라고 한다]에게 정복당하여 14년 동안 통치를 받으나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국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침략과 주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 [[오로모인]] 등 여러 이민족의 이동으로 솔로몬 왕조는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파일:external/34095555612_f673bac669_o.jpg|width=100%]] || || [[킬와키시와니]] 대모스크 유적의 내부 [br] 10세기경 건축 || [[동아프리카]] 해안으로는 [[인도양]]을 통한 [[유라시아]] 전역의 바닷길 무역이 이어져 [[황금]], [[상아]], [[목재]] 등의 무역을 통해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해안으로 다양한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인도양 바닷길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들로는 [[모가디슈]], 말린디, [[몸바사]], [[잔지바르]], [[킬와키시와니|킬와]], [[모잠비크]], 소팔라 등이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의 주민들 또한 인도양 무역 상인들과 접촉하며 교류하였다. 특히 [[스와힐리]] 문화권을 형성한 느슨한 민족군을 일컫는 [[스와힐리족]] 사이에서 그러한 무역이 특히나 활황을 누렸으며,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해당 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해당 지역의 언어인 [[스와힐리어]]가 이때 당시 무역 공용어로 사용되며 [[아랍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 또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9세기부터 13세기에는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한 모가디슈 술탄국이 있었다. 당시 모가디슈는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과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주요 도시이자, 동아프리카 황금 및 상아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다. 또한 13세기 이후로는 아주란 술탄국이 출현하여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내륙에서는 [[반투족]] 민족들이 점진적으로 팽창하며 다양한 문화권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렵 채집 민족들이나 [[유목민]]들을 밀어낸 [[반투족]] 민족들은 공통적으로 발달한 농업, [[철기]] 기술, 석조 건축 등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중심으로 1375년경에 [[콩고 왕국]]이 이룩되었다. 콩고 왕국의 원래 국체는 음바타 왕국과 엠팡바카시 왕국이었는데 이들 국가는 14세기 말경에 결혼 동맹을 통해 합병되어 콩고 왕국으로 거듭났으며 그 시기는 대략 14세기 말 정도로 추정된다. 콩고 왕국은 빠른 속도로 주변 부족들을 군사적, 외교적으로 평정해나가며 세를 확장했으며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앙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콩고 왕국은 '뭬네콩고'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를 구성하고 있었고, 왕국에 속하지 않은 주변의 국가들인 응오요, 카콩고, 로앙고, 은동고, 마탐바 등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파일:external/www.exploring-africa.comsitesdefaultfilesuploadsarticle324covergreat-zimbabwe-still-standing-strong-simonchihanga.jpeg.jpg|width=100%]] || || [[그레이트 짐바브웨|대 짐바브웨 유적]] [br] 9~15세기경 점진적 건축 || [[남아프리카]]에서는 9세기경 림포푸 협곡을 주위로 해 칼랑가어족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에 의해 마풍구브웨 왕국이 수립되어 다양한 석조 유적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1세기 가뭄과 인력 부족으로 마풍구브웨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에 마풍구브웨 왕국이 멸망하자 [[쇼나족]]에 의해 짐바브웨 왕국이 세워졌다. 짐바브웨 왕국은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융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확장하였으며, 현재 [[그레이트 짐바브웨]]라고 알려진 대규모 도시 유적을 남겼다. 쇼나족은 또한 발달한 철기 제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철기 유적을 남겼으며, 또한 그들의 전통 악기인 [[음비라]]는 가느다란 철판을 이용하여 만드는 등, 발달한 제철 기술은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짐바브웨 왕국은 또한 정교한 석상 유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왕권을 상징하는 새(鳥) 조각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후 짐바브웨가 쇠퇴하자 냐심바 무토타가 왕의 칭호인 '므웨네'를 칭하며 무타파 제국이 건국되었고(1350) 짐바브웨 왕국 영토의 대부분을 계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