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동남아시아 === [[베트남]] 북부에서는 오래전에 월(越)족이 국가를 세웠으나 당시 등장한 대제국인 고대 중국 [[전한|한나라]]에게 정복당한(111) 이후 800년 동안 중국의 여러 제국들에게 돌아가며 식민지배를 당했고 그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문화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다. [[쯩 자매]]나 [[조씨정]] 등 또한 계속해서 등장하며 끊임없이 중국에 저항하면서 독립을 시도했다. 907년 중원에서 대제국 [[당나라]]가 내전으로 멸망하고 960년에 다음 통일 제국인 [[송나라]]가 건국되기까지의 치열한 전쟁인 [[오대십국시대]]의 공백기 동안 중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기회를 노려 [[응오꾸옌]]이 베트남에 주둔 중이던 중국군을 몰아내고 최초의 베트남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938). 그러나 왕조 수립 후 30년 후 12명의 장군이 자기 세력권에서 일제히 난을 일으켜 [[십이 사군 시대]](965~967)에 들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쩐람의 후계자 [[딘보린]]이 다른 장군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 새 국가인 [[대월]]을 세웠다(968). 베트남 남부에서는 월(越)족과 민족적으로 다른 참족이 살았는데, 베트남의 월족이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이들은 [[참파]]라는 독립 국가를 세웠다(192). 그들은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중화 문화의 영향력 아래 속해있던 베트남 북부와 다르게 참족은 민족적, 문화적으로 판이했고 이후 대월이 수립되고 나서 월족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해 나가며 참족과 대치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베트남/역사#s-5.4|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gkor_Wat.jpg|width=100%]] || ||<:> [[앙코르 와트]] [br] 12세기 축조 || [[캄보디아]] 지역에는 1세기부터 프놈(부남) 왕국이 존속하다가 6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프놈 왕국의 속국이었던 쩬라(전랍) 왕국이 독립하여 9세기에 그 유명한 [[크메르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크메르 제국은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영토를 넓히며 동남아시아 지역의 절대적 강자로 군림했다. 수도였던 [[앙코르]]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그 상징이 바로 [[앙코르 와트]]였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태국 지역의 아유타야 왕국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점차 쇠퇴했으며, 속국이었던 란쌍도 자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도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하여 동남아시아의 패자(覇者) 자리를 내려놓는다. 이때 자립한 [[란쌍 왕국]]은 훗날 삼국 분열과 식민 지배를 거쳐 오늘날의 [[라오스]]가 되었다. [[태국]]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몬족은 동남아시아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민족 중 하나로 동남아 각지에 드바라바티, 스리 고타푸라, 하리푼차이, 타톤 등 여러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크메르 제국]]의 성립과 타이족의 도래 이후로 점점 영토를 잃고 밀려나 오늘날 [[태국]]과 [[미얀마]]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타이족은 본디 중국 남부에 살던 이민족이었으나, 고대 중국의 침략으로 식민지배를 당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8세기 [[당나라]] 시대에 [[안사의 난]] 등등 군인들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당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다시 진압당하여 일부는 중국 남부에 남고 나머지는 버마족과 함께 동남아시아로 쫓겨나게 되었다. 라오족은 이 타이족의 일파로 [[라오스]] 지역에 정착했고, 나머지 타이족은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태국 일대에 터를 잡게 된다. 이중 미얀마의 샨 고원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샨족이라 하며, 오늘날 미얀마의 소수 민족이다. 중국 남부 지역에 남은 타이족은 [[대리국]]의 지배를 받다가 12세기에 쳉훙왕국을 건설하여 13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나, 이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몽골 제국 등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 [[파일:람캄행동상.jpg|width=100%]] || ||<:>[[람캄행]] [br] {{{-2 (1239? ~ 1298?)}}}|| 몬족을 몰아내고 [[태국]] 지역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크메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수코타이, 란나, 파야오의 세 왕국을 세웠다. 수코타이 왕국의 [[람캄행|람캄행 대왕]]은 [[태국 문자]]를 창제하는 등 학문적인 발달을 이끌었고, 타이족 3국 동맹을 맺어 크메르 왕국에 맞섰으나 곧 파야오 왕국은 란나 왕국에 흡수되었고, 그 무렵 [[쿠빌라이 칸]]의 강성한 정복 전쟁으로 잠시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대왕 사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결국 남쪽에서 일어난 [[아유타야 왕국]]에게 정복당했다. [[미얀마]] 지역에는 몬족과 퓨족 등이 살고 있었다. 9세기에 고대 중국의 [[남조(왕국)|남조]] 제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즈음 타이족과 버마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남하하여 버마족과 상술한 샨족이 이 땅에 터를 잡게 된다. 11세기 이 지역에는 버마족의 버간(파간) 왕국이 존재했다. 이 왕국은 몬족 등 주변 민족들의 땅을 빼앗으며 성장했으며, 이에 몬족은 끈질기게 대항한다. 1254년 당시 버간의 무능한 왕이었던 우즈나가 사망하자 실권자 야자티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장자 타히투 대신 서자 나라티하파티를 즉위시킨다. 그러나 야자티잔과 나라티하파티 간에 충돌이 있었고 결국 나라티하파티는 야자티잔을 살해하나 이로 인해 왕권이 실추되었다. 이 즈음 [[원나라]]는 미얀마를 침략해 정복하면서 식민지배하게 되고,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가 타히투에게 살해되며 버간 왕국은 멸망한다. 미얀마의 북부 지방이 [[원나라]](원제국)에 정복되어 있는 동안 남부에서는 몬족이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북부에서도 샨족이 원제국의 점령군을 몰아내기위해 고군분투했고 샨족과 버마족으로 이뤄진 잉와(아바) 왕국을 세운다. 그보다 북부에도 다른 샨족의 왕국들이 여럿 들어서 잉와 왕국과 끊임없이 싸운다. 15세기에 이 북부의 샨족들이 돌연 운남을 선공하자 미얀마를 침략하려는 기회를 노리던 명나라는 역공을 가해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화시켰다. 그럼에도 북부의 샨족들은 존속하여 1527년에 잉와 왕국을 멸망시킨다. 이때 잉와의 속국이었던 [[따웅우 왕조]]가 독립하고, 곧 제국으로 성장하여 미얀마 전역을 통일했다. ||[[파일:external/tourjogjajava.files.wordpress.com/budur-1.jpg|width=100%]]|| || [[보로부두르]] [br] 8세기 중축 || [[자바 섬]]에는 화산의 계단식 논을 통한 농업 시스템이 발달해 있었다. 자바 섬은 모내기 농법의 발명과 화산성 토양의 비옥함 덕분에 농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이러한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출현하게 된다. [[자바 섬]]의 역사에서 최초로 당대 문자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4세기 자바 섬 서부에 존재한 [[타루마 왕국]]이다. 타루마 왕국과 [[칼리만탄]] 지역의 쿠타이 왕국의 고대 비문은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적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인도 문화의 짙은 영향을 받은 당시 해당 지역의 상황을 보여준다. 7세기에 [[순다 왕국|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이 타루마 왕국을 계승하게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공존하게 되었다. 자바 섬 동부는 서부와 달리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는 순다 왕국의 산자야 왕이 세운 [[마타람 왕국]]이 있었다. 마타람 왕국은 발달한 농업을 등에 업고 많은 수의 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력은 정복이나 건축 사업 등지에 동원되었다. 이 시대의 마타람 왕국의 주요 건축물로는 [[보로부두르]]가 있는데, 발굴된 유물이나 비문으로 추정하였을 때 중부 자바에 있던 마타람 왕국의 사일렌드라 왕조가 번성하던 약 8세기 무렵, 750~840년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가장 큰 [[불교]] 건축물로 남아 있는 [[보로부두르]]는 [[불교]]를 숭상하던 마타람의 사일렌드라 왕조의 야심이 엿보이며, 시각적 디자인에서는 당시 자바 섬의 종교적, 문화적 특색이 묻어나오는데, [[만다라]]를 상징하는 수많은 층계와 더불어 전통 토착 종교, 힌두교, 불교의 세계관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에서는 믈라유(말레이) 왕국이 존재했는데, 7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이 등장하여 믈라유 왕국을 속국화, 이후 11세기에 완전 흡수하여 강력한 제해권을 가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라카 해협]]를 장악하고 있던 [[스리위자야]]는 상인들은 배를 이용하여 [[황금]], [[녹나무]] [[수지]], [[쌀]], 백단향, 그리고 [[육두구]]와 같은 [[향신료]] 등을 [[중국]]과 [[인도]] 지역에 수출하여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이렇게 지역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힌두교]]와 [[불교]]가 유입되었으며 스리위자야에는 전통 신앙, 힌두교, 불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 문화가 형성되었다. 스리위자야의 해안 도시들은 다양한한 문화가 혼합되며 [[중국인]], [[말레이인]], 토착 원주민, 그리고 동남아 타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며 교류했다. 11세기 초에 들어서는 스리위자야가 사실상 도서부 동남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밀집된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를 모두 통제하는 패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스리위자야]] 왕국은 자바 섬을 정복하고, 이때 정복당한 마타람 왕국 마지막 왕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가 [[카후리판 왕국]]을 세워 스리위자야 왕국을 몰아내고 동부 자바 지역을 돌려받는다. 그는 두 아들에게 왕국을 장갈라와 크디리의 둘로 나눠 물려주고 자신은 속세를 떠나 수도승 생활을 한다. 이중 크디리가 장갈라를 흡수하고, 크디리 내부에서 왕권과 종교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던 사이 1222년 종교 세력의 지지를 받은 지방 영주 켄 아록이 혁명을 일으켜 크디리 중앙군을 물리치고 [[싱하사리 왕국]]을 세운다. 싱하사리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대등하게 성장해서 이내 수마트라 섬 영토를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 [[파일:라덴위자야.jpg|width=100%]] || ||<:>라덴 위자야 [br] {{{-2 (? ~ 1309)}}}|| 한편 [[스리위자야]] 왕국은 외부적으로는 촐라 왕국의 침략과 싱하사리 왕국의 압박에, 내부적으로는 믈라유 왕국 세력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결국 회복 불가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수마트라 섬에는 믈라유 왕국을 계승하여 다르마스라야 왕국이 성립되었다. 1290년 싱하사리 왕국은 다르마스라야 왕국을 정복하여 인도네시아 군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즈음 중원을 장악한 [[쿠빌라이 칸]]은 1280년, 1281년, 1289년에 싱하사리 왕국에게 원제국의 식민지가 되라고 사신들을 보내 명령했으나 새로운 강대국 싱하사리 왕국이 이제는 원제국과 대등한 관계라고 착각한 케르타네가라 왕은 세번 다 거절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명령을 가져온 사신의 경우 사신의 얼굴에 [[낙인]]을 찍어 돌려보내며 거절했고 이에 [[원나라]]는 격노해 [[자바 섬]]을 정복하기 위해 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1292년 [[원나라]] 군대가 자바 섬에 도착했을 때 싱하사리 왕국은 이미 자야캇왕 왕 치하의 크디리(글랑글랑) 왕국의 반란에 의해 3년 전 병합되어 버린 상태였다. 원군의 핵심적인 목표는 글랑글랑 왕국의 정벌이 아닌 자바 섬 정복이었기에 크디리 왕국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싱하사리 왕국의 죽은 왕의 양자였던 라덴 위자야는 기지를 발휘해 원제국에게 크디리 왕국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돕는다면 원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원군은 라덴 위자야와 동맹을 맺어 크디리 왕국의 군대를 쉽게 격파했으나, 라덴 위자야는 게릴라 기습 공격으로 원을 배신하여 원군을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라덴 위자야는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하게 되었다(1293). ||[youtube(sZZTfu4jWcI,height=150)]|| || [[자바 섬|자바]], 순다, 그리고 [[발리]]의 [[가믈란]] [br] {{{-2 가믈란 음악은 8세기경 [[자바 섬]]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마자파힛 제국]] 시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 14세기 여군주 [[트리부와나]], 그리고 그와 그의 남편 투마펠 공 차크라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하얌 우룩 황제 시대의 마자파힛 제국은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는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자바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러,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제도에서의 통일된 국체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원나라]]-[[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이는 등 문학적 발달 또한 이뤄졌다.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는 이 제국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주로 수도 마자파힛(트로울란) 근처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자바 전역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힌두-불교 사원 건축물 또한 대개 마자파힛 시대의 것이다. 마자파힛 시대 [[자바 섬]]의 대표적인 건축 유적으로는 파나타란 사원이 있는데, 파나타란 사원은 12세기부터 조성되어 14~15세기 중반까지 주로 증축된 대규모 사원으로, 자바식 힌두-불교에 영향을 받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조가 특징이다. 또한 음악으로는 [[자바 섬]]에서 비롯된 [[가믈란]] 음악이 다양한 섬들로 유입되어 각 섬의 음악적 문화에 맞게 발달하였고, 금속 재질의 [[타악기]]들이 사용되기 시작해 특유의 청아하고 몽환적인 음색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가믈란 음악은 이러한 모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