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유럽 === ||[[파일:Mosaic_of_Justinianus_I_-_Basilica_San_Vitale_(Ravenna).jpg|width=100%]] || || [[유스티니아누스 1세]] [br] {{{-2 (482~565)}}} ||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 신화|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본래는 일치된 단일한 교회였으나, 5세기 이후[* 칼케돈 공의회{{{-2 AD 45)}}} 전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이라기보단, 동방에서의 선두 자리를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대립하는 구도였다. 당연한 것이, 로마-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천도 이후에야 제국의 주요 도시로 격상된 것이기에 초창기엔 로마는 커녕 알렉산드리아보다도 권위가 낮았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신학적/문화적/정치적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점차 분열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당시 로마 주교, 곧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매우 미묘한 것이었다. 한편으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주교는 이전부터 주교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도 로마가 '어떠한 의미에서 첫째인가'에 이의를 제기할 뿐, (어떤 형식으로든) 로마 주교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며, (무슨 의미인지엔 이견이 있어도) 첫째 주교라는 건 인정하였다. 종합적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한참 경쟁하던 9세기 포티오스 분열 당시의 교회 정치적 구도는 이러했다: >황제는 포티우스가 영구히 제거되기에는 너무 강력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포티우스가 복권되어야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평화 또한 로마의 권위의 도움을 얻어서야 회복될 수 있었으니, 포티우스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던 강력한 반대파도 로마 역시 포티우스를 지지하고 있음을 전해 듣고는 결국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기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 필요했고, 사실 로마의 권위는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마의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외에 달리 행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실 로마는 무엇인가 달리 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 >클라우스 샤츠{{{-2 (''Klaus Schatz'')}}} 씀, 이종한 옮김, "보편공의회사" 124-125쪽 ||[[파일:european.world.ad.814.png|width=100%]] || || 814년의 유럽 || 다시 돌아와서, 일치 당시에도 미묘했던 서방-동방의 관계는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성상(조형물)|성상]]파괴령을 내리면서 더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에는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던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가문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후, 카롤루스 대제(768년 ~ 8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함.], 즉 샤를마뉴를 서방의 새로운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킴으로써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은 이제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왕]]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제도|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의 [[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 [[파일:카노사의 굴욕.jpg|width=100%]] || || [[카노사의 굴욕]](1077) [br] {{{-2 [[하인리히 4세]](中)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左)와 마틸데 여백작(右)에게 간청하는 것을 그린 12세기의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쓰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귀족|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다 결국 막강해진 교황권에 의해 [[십자군 전쟁]](1095년-1291년)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4차]](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은커녕 [[예루살렘|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해 버림으로써, [[정교회]]와의 연을 끊어버리는 등, 사실상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정적으로 1350년대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때 [[아비뇽 유수]]도 발생한다.] [[몽골 제국]]이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등의 동유럽을 정복하면서 저지른 학살 등과 함께 몽골제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진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7,500만 명~2억 명의 인구,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하는 대재앙을 겪었다. 이로써,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농업)|장원]] 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 [[파일:HCOzzxa.jpg|width=100%]] || || [[잔 다르크]] [br] {{{-2 (1412~1431)}}} || 유럽의 중세 말기에 중요한 사건 하나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기사도]]가 최대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쇠퇴기에 들어간 시기이며,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물론 서유럽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두 나라의 국민정체성을 싹트게 했다. ---그렇게 19세기 초엽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역사|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옛날 룸 술탄국, 셀주크 투르크 때는 [[몽골 제국]]의 식민지로써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또 후에는 몽골제국의 계승국인 [[티무르 제국]]에게 앙카라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함으로써 술탄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등 최악의 흑역사를 계속해서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오스만 제국은 옛날에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때처럼 티무르 제국의 지배에서도 벗어남으로써 드디어 최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1453) 유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의 [[후녀디 야노시|군]][[블라드 가시공|주]][[슈테판 3세|들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헝가리 왕국]]은 [[모하치 전투]](1526) 이후, 나라가 분열되고, [[왈라키아 공국]](1522)과 [[몰다비아 공국]](1476)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