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화제 (문단 편집) === 똑똑한 황제였던 시절도 있었다 === 비교적 젊은 나이인 16세에 황위에 오른 헌종은 성격이 차분하고 도량이 넓으며 비교적 충신을 알아보는 황제였다. 성화 3년 헌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좌서자 여순이 상소했다. 헌종이 태자였을 때 폐위당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헌종은 대종 주기옥에게 원한을 품어 황제로 등극한 이상 개인의 원한을 풀기 위해 얼마든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주기옥의 일족을 멸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만약 태자 폐위의 전말을 추궁하면 그 사건과 관련된 수 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형벌을 피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친 영종에 의해 성려왕이라는 치욕을 당한 주기옥을 다시 황제로 추존하는 은덕을 베풀었다.[* 어차피 주기옥의 유일한 아들인 주견제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남은 가족이라고 해 봤자 폐황후 왕씨와 왕씨 소생의 황녀 고안공주 정도뿐이었기에, 제위에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딱히 멸족시킬 만한 일족도 없었다.] 또한 헌종은 충직한 신하를 알아보고 중용한 황제였다. 즉위 초기에 비교적 정국의 안정을 이루었던 까닭은 이현, 팽시, 상로 등 충신들을 중용한 덕분이었다. 이현은 선덕 8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정통, 경태, 천순, 성화 연간에 이르는 동안 황제를 바르게 보필하고 국정을 바로잡은 충신이었다. 성화 3년 이현이 59세의 나이에 병사하자 헌종은 그를 태사로 추증하고 문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애도했다. 또 성화제는 재위 중에 [[우겸]][* 정통제 시기의 대신. [[토목의 변]]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았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 성화제 시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큼직한 사건 (형양의 반란이나 광서 지역의 반란 등) 몇 개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온하였으며, 대체로 원만한 치세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명사에서 평하기를 [[홍희제|인]][[선덕제|선]]의 치세가 돌아왔다고 할 정도였으며, 명대 사람들은 성화 - 홍치로 이어지는 시기가 명나라의 마지막 평화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 끝까지 이대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중기 이후에는 실정을 연달아 저지르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